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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Feb 02. 2023

부父의 장례

뉴스에서 고독사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면 남일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사는 내 아버지의 죽음도 고독사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엄마가 떠난 후로는 더더욱, 나에게 ‘죽음’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버지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자주 생각했었다.  

    

내가 가장 최근에 아버지를 본 것은, 2021년 6월, 남동생의 결혼식에서였다. 꼬장꼬장한 성격에 고집스러운 말투는 여전하셨고, 식사를 아주 잘하셨다. 건강하셨다. 그 이후로 가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올 때면, 나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떠난 후, 나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나의 마음 한편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남동생이 한 달에 한 번쯤 안부전화를 드렸고, 명절에는 올케와 함께 아버지 댁 근처에서 식사도 나누었다고 했다. 그만하면 되었지. 나는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한 해가 지났으니 벌써 작년이 되었구나. 2022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9시가 넘었을 무렵. 남편이 퇴근길에 사 온 순대볶음을 차려놓고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배는 두둑이 마음은 가볍게 금요일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울먹였다. 경찰서로 가고 있다고 했다. 급히 전화를 끊고, 남편과 나는 옷가지를 챙겨 입고, 택시를 잡아타, 경찰서로 갔다.      


아버지는 공인중개사무소를 하셨다. 말이 공인중개사무소지, 시골에나 있을법한 낡고 허름한 복덕방이었다. 아버지는 하루일과가 매우 정확하고 변수가 없는 분이셨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을 먹고, 가게문을 열고, 점심을 먹고, 가게 문을 닫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드는, 정확한 패턴을 가지고 계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말 공휴일 명절 상관없이 가게 문을 열고 닫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일주일째 가게 문을 열지 않으셨고, 이를 도무지 말도 안 되게 이상한 일로 여긴 옆 가게 사장님이 혼자 사시는 노인인 것을 알고, 경찰에 신고하셨다. 경찰은 가게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고, 아버지가 왜 일주일 동안 가게 문을 열지 못하셨는지 확인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집에서. 잠들어있는 자세로.     


병원에 환자로 누워 의료진 앞에서 사망선고를 받고 맞이하는 죽음 이외의 죽음에는, 여러 확인절차가 필요하다. 경찰서에서 남동생은 그 확인절차를 하나하나 이행했다. 뒤이어 경찰서에 도착한 나의 둘째 언니는 나와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러 갔다. 돌아가신 지 며칠이 지난 터라 시신은 부패가 진행되었다. 나와 남편과 둘째 언니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떨리는 턱을 앙 다문채로, 부패되었으나 나의 아버지가 분명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했다. 남동생은 경찰서에 두고 온 것이 다행이구나 생각되었다. 남동생이 보았으면, 많이 힘들었으리라.     


신속히 장례식장을 잡았고, 3일장을 치렀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지 고작 2년 2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우리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익숙하고 능숙하게 3일을 보냈다. 남동생이 결혼을 했으니, 가족이 하나 늘어 올케도 함께 상복을 입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도 많이 완화되어, 장례절차에 불편함은 없었다.  

    

3일장을 치른 후,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형사의 권유로 부검을 진행했다. 부검 후 입관을 하고, 발인을 하였고, 분당에 있는 자리 좋은 추모관을 찾아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의 부재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 가게 옆 가게 사장님께 과일과 건강식품을 후하게 챙겨가 인사를 드렸다. 우리의 사연이 어찌 되었든, 죄 많은 자식들을 대신해 아버지의 출퇴근을 챙겨보시고, 아버지의 부재에 관심 가져주신 감사한 분이었다. 사죄의 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왔다.      


4남매 모두 함께 아버지의 집에 갔다. 아버지의 가게에는 내가 중학생일 때 갔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버지의 집은, 처음이었다. 처참했다.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낡은 집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태의 집이었다. 집이 넓지 않고 살림살이가 많지 않아 짐정리를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유품 정리업체를 알아보기로 했다. 중요한 서류들과 챙길 물건들만 꼼꼼히 확인하고 우린 각자의 집으로 귀가했다.     


엄마의 장례를 경험하고 난 뒤라, 어렵지 않게 여러 서류 작업들을 마무리했다. 재개발을 바라보고 매매하신 아주 허름하고 낡고 비좁은 골목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처분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큰 과제이다. 그 이외의 자잘한 일들은 무난히 정리되었다.     


우리 집 가정사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나의 지인은 이런 말도 하셨다. ‘어머니 가시고 아버지가 많이 힘드셨나. 아버지가 어머니 그리워서 따라가셨나 보다’라고. 술 한 잔 따라드리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30년도 더 전에 이혼하셨다고 말씀드렸다. 씁쓸해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다들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셨다.     


아버지는 워낙 건강하셨고, 그 흔한 고혈압 당뇨 같은 지병도 없으셨던 터라 이렇게 빨리, 80살에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고독사를 늘 예감하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90살, 어쩌면 100살까지 사실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건강하던 아버지에게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이 찾아오면, 그 간병은 어찌해야 하나. 내심 걱정하기도 했었다. 우리에게 부父는 든든한 친정아버지가 아니라, 가족관계증명서에 또렷이 명시되어 있는, 내 몫의 무거운 십자가였다.     


그런 아버지가 홀연히 가셨다. 잠들어있는 자세로.


아버지의 마지막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갑자기 추우셨는지.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 아프셨는지, 숨이 막혀왔는지. 고통스러우셨을지. 고통 없이 가셨을지. 아무도 모른다. 부검결과는 허혈성심장질환정도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그 원인과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집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와 엄마와 우리 4남매의 상처와 사연이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 죄는 올곧이 우리의 몫이다. 나는 부패된 아버지의 시신을, 늘 단정히 면도되어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수염으로 덥수룩하게 덥혀있던 그 모습을, 아버지의 그 마지막을, 사는 내내 사진처럼 떠올리며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죄이고, 나의 업이다. 내가 묵묵히 짊어져야 할, 내 남은 생애 내 몫의 십자가이다. 이 또한 내가 사는 동안, 수없이 마주해야 할, 생의 파도가 되겠지. 나는 이 파도를 잘 넘고 넘으며, 나의 생을 살아내야겠다.     


나의 아버지 김기웅. 편히 쉬소서.

아멘.     



** 아버지. 다음생애엔, 우리 꼭 좋은 인연으로 만나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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