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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누룽지 May 16. 2023

흐르는 강물처럼

넋두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치는가? 우리는 고요한 침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가? 


 흐르는 강물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자연의 힘에 반하지 않는, 돌을 던지면 바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은 중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밑을 향해 계속해서 낙하할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향해서 가는 것일까? 흐르는 강물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모름지기 그것은 한 곳을 향해 가게 되어 있다. 바다라는 이름의 광활한 세계. 그들은 바다를 유영하며 아름다운 푸른색을 만든다. 그들은 목적지가 있다. 


 인간은 어떠한가. 목적지가 있는가? 그저 고기가 없는 바다에서 유랑하는 낚시꾼처럼 고기가 올 때만을 하염없이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며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끼를 아무도 물지 않는, 열심을 다해 시간을 쏟고 기다려도 성과를 낼 수 없는, 그동안의 미끼는 허비이자 낭비이며, 소득이 없는 낚시꾼에게 찾아오는 황망함, 불신과 진노. 고기가 없는 바다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메아리에 불과하고, 누구에게 터놓을 만만한 안주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내면에 쌓아두고 겉으로는 목적지가 있는 척, 물고기는 반드시 있다는 공허한 믿음을 되뇌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푸른빛의 목적지가 없는 우주 먼지 같은 우리는 왜 힘든 것을 힘들다 이야기하지 못하고, 목적지가 없다는 것을 쉬이 이야기하지 못할까. 그리고 그 목적지가 없다는 것을 가엾이 여겨 무언가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약을 먹고 죽기 전, 자신의 영혼이 하데스로 가서 영웅과 신을 만나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며 자신을 두고 슬퍼하는 이들을 되려 다그쳤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철학자에게는 최고의 것으로 결국,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소크라테스만큼은 아니겠지만, 삶 속에서 철학을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죽음인가? 하지만, 죽음 이후에 영혼만 남은 우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지를 원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은 탁월성을 갖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을 잘하는 것. 그 속에서 좋음이라는 지극히 배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느끼고 즐거움을 얻어 이를 습관화하여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자신이 잘하는 것을 개발하고 그것을 통해 좋음과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행복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으로 둘만한 좋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과 별개로 관련한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동시에 느낀다. 누군가에 의해 탁월한 능력이 폄하되거나 공격당하는 것, 부정되고 거절당하는 것은 우리의 실낱같았던 탁월함을 격하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탁월한 능력에서 멀어지게 하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즐거움과 좋음은 행복이라는 목적지와도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의 인생이 대부분 그렇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진 연인처럼 이미 한 번 멀어진 목적지를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목적지를 상실한 것과 같다. 아니면 아예 없었거나.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지는 대체 어디인가? 사랑하는 것인가? 가족을 이루는 것? 지혜를 얻는 것?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 마치 현세는 목적지 없는 방랑자들의 어울림 같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물리법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인간도 당연한 절차를 거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의미 없는 진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는 밀도 높은 피로와 상처, 버거운 짐과 공허한 기운이 가득 차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리고 그 내면은 볼 수 없도록 꽁꽁 옷과 몸이라는 치장으로 넓게 덮어둔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그 속이 맑고 투명하다. 겉과 속도 다르지 않고, 눈으로 봐도 정화로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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