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그림 by 임성민 (웹툰 겨울의 글쓰기 중)
어른이 된 순간 우린 더 이상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는 거겠지.
조금 어릴 땐 부모탓이 가능했다. 부모를 탓하다 환경을 탓하다 이도저도 안 되면 나보다 나은 누군가를 탓하고 얼굴도 모르는 이방인들을 탓했다. 신을 탓했다면 조금 나아질까. 있지 않다고 믿으면서 있길 바랐던. 있길 바라지만 나를 이런 모습으로는 놔두지 않았으면 했던 내가 만든 신.
누구라도 탓하면 잠깐은 통쾌했다. 난 원인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들의 안타까운 결과라고, 그러면 가여워할 수 있었으니까. 동정도 해보고 자책도 해봤는데 부끄럽지만 동정이 좀 덜 아팠다.
부모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났다는 점은 좀 짜증났다. 부모도 최선의 노력을 다 한 것일 텐데. 그런 부모도 안 되는 게 있고 어쩌면 젊은 우리보다 어딘가가 더 많이 부족한 가여운 사람들일 텐데. 마음이 괜찮을 땐 이런 생각도 가능했다.
하지만 보통은, 탓할 곳이 궁색해지면 나를 낳은 것을 가지고 탓했다. 그들이 가진 것을 탓할 순 없으니 나를 낳은 선택을 탓했다. 아무것도 없을 땐, 낳지 않는 선택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지 않을 선택.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선택.
왜 그들은 사람을 선택했을까. 반려견도 있고 어울리지 않지만 반려묘도 있고 자신들의 남겨진 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없던 사람을 만들어 계속 살게 했다. 다른 욕심이 없었던 걸까. 더 많이 사랑할 존재를 만들고 싶어서였을까. 그럼 정말 더 많이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자신해서였을까.
요즘은 자꾸만 약해지는 부모를 생각한다. 그들은 사소한 걸 자주 까먹고 작은 집안일도 힘에 부쳐하며 가벼운 운동도 귀찮아한다. 그렇게 닮고 싶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난 갈수록 많이 걸치고 살아가는데 그들이 늙는 모습도 내가 닮아갈 모습일까.
어쩌면 난 마음이 아픈 걸 수도 있다. 하나둘씩 놓아버리는 그들의 모습에. 욕심도, 분노도 없어져가는 모습에. 조용히 앉아 아무리 봐도 내용을 모르는 드라마를 몇 시간씩 시청하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드라마 내용이 뭐냐고 물으면 그저 모른다는 답만 돌아오는 그 모습에. 슬쩍슬쩍 웃는 그들의 얼굴을 힐끗 본 적이 있었다. 그 순간엔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웃었지만 돌아보면 불안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그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 많이 슬퍼졌다.
난 자주 그들을 탓했다. 나를 낳은 걸,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키워주지 못한 것, 내가 좋아하지 않는 습관과 성격을 물려준 것. 이 모든 걸 그들을 탓할 때마다 조금 통쾌하고 시원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내용도 모르는 드라마 앞에서 슬쩍 웃고는 꾸벅꾸벅 조는 그들의 모습 앞에서는, 이 모든 탓들이 무력해졌다. 그들을 너무 많이 탓한 게 미안해졌고 난 너무나 어른이 되어버린 게 부끄러웠다.
난 이제 더 이상 무언가의 결과가 아니다.
어느새 난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어른은 무언가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원인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좋은 원인이 되어야 한다. 어른의 선택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니까. 새로운 사람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탓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난 또 다른 사람의 탓이 될 것인가.
나의 부모를 닮은 어른이 될 것인가.
누군가가 나를 보고 마음껏 탓하는데도 대응도 못할 정도로 약해질 것인가.
웃음에도 힘이 없고 재미난 것들은 잊은 지 오래된 사람처럼. 자주 까먹고 주기적으로 까만 염색이 필요한. 어떤 물음에도 느린 대답을 던지는. 그런 사람처럼. 될지도 모르나.
그들이 내 탓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이젠 매일매일 조금 더 가볍고 기분 좋은 꿈을 꾸길. 너무 고마운 사람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들. 어떤 모습으로든 오래도록 내 주변에 있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