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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백 Dec 01. 2021

쉽게 그려진 그림(畵)

[아이패드 인물화] 나누고 싶은 시 한 편

::아이패드 인물화::

 연구작 20210816

연구작 - 인물화, 2021, Digital Painting | iPad Pro5 | Procreate


이 그림을 그릴 무렵에 문득 떠올랐던 시가 한 편 있었다. 그림과 짧은 글을 소개하던 한 SNS에서, 시집 읽기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몇 편의 시를 소개했었고, 그림을 그릴 때 떠올랐던 그 시도 역시 소개했었다. (시를 소개하는 글이라기엔 사족이 긴 글인데, 공정치 않게 그냥 남의 시만 갖다가 쓸 수는 없는 것이라, 그와 관련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 긴 사족이 시의 매력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후의 어느 날, 문득 그때 그렇게 쓴 글이 어쩌면 이곳에 더 알맞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이렇게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그때의 그림과 함께 앉혀 놓는다. 둘 사이에 특별한 관련성은 없다. 하지만 왠지 같은 때에, 함께 마음속을 떠다닌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수 있다는 것을 핑계로, 그 시와 해당 그림을 이렇게 소개해 본다.

   


[ 나누고 싶은 시 한 편 그리고 시를 만난 날의 기억 ]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1942. 6. 3.



- 《정본 윤동주 전집》, 윤동주, 문학과 지성사




이번에 소개해 드릴 시집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고, 또 마음 깊이 좋아할 만한 시인인 윤동주 선생님의 시집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은 현재 많은 출판사에서 여러 방식과 형식으로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현재 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해서,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한 《정본 윤동주 전집》을 소개합니다.


대략 한 10년 전까지는 간간히 시 한 편을 읽은 적은 있었어도, 시집을 한 권 통째로 읽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다른 분야의 책들보다 문학 분야의 책들은 손이 잘 가지 않는 편이었고, 특별히 시집은 왠지 더 그랬습니다. 어렵다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살면서 바로 옆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다시 또 굳이 책에서까지 찾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당시의 생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의 그런 취향이 어쩌면 편견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로 그러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일단 무작정 문학책을 읽어보려고 했습니다만, 역시나 잘 읽히지 않았고, 매번 다른 분야의 책으로 손과 발이 은근슬쩍 옮겨 가곤 했습니다.


결국 강제로라도 읽어봐야겠다는 판단에, 한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읽기로 약속하고 만나는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억지로라도 문학책을 읽게 되었죠. 그리고 드디어 한 권의 시집이 다음 모임의 주제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주제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라면 아무 출판사의 책이라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기에 당연하게도, 당시엔 가지고 있는 시집이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살 여력 또한 없었던 터라서 중고 서적을 찾아보다가,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리는 《정본 윤동주 전집》을 중고가 4,100원(당시 정가 9,000원)에 구하게 되었습니다. 새 책을 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깨끗한 책을 구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의  발걸음이 떠오르네요.




예상 대로, 한 권을 읽어내기가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시와 어려운 시들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 나름의 표시를 해 가며 읽다 보니 결국, 어느덧 마지막까지 읽어냈습니다. 그렇게 이 책은 생애 처음으로 완독을 한 시집이 되었죠.


한 권의 시집을 처음 읽은 느낌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뭔지 모를 마음의 진동이 아주 미세하게 있을 뿐이었죠.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독서 모임에 참여했고, 두 시간의 모임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상을 공유했습니다.


감상을 공유하면서 무엇인지 모를 마음의 일렁임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당시엔 몰랐습니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과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 일렁임이 어떤 흥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흥분은 어린 시절 좋아하는 무언가와 재밌게 놀고 돌아갈 때의 즐거움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이전에는 논리적인 깨달음이 아니면 감탄을 한 적도 없었고, 또 그런 깨달음에 감탄을 한다고 해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날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동행하고 있던 분들에게 또 다른 시집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때 저는 시와 만났습니다.


나중에야 그날의 감각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세세하게 말하자면 여러 가지로 표현해서 말할 수 있겠지만요. 그 한 마디는 바로, '반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에게 반해 사랑을 하듯, 시집을 한 권 읽던 그날 저는 저도 모르게 시에게 반한 것이죠. 처음 사랑을 느끼고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처럼, 시에게 반한 그때도 그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는 의미는, 적어도 저에겐, 어떤 한 사람과 '진심의 귀를 가지고 조금 더 오래 그리고 깊이 소통한 일'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렇게 시를 나누는 것에도, 그림을 그려 보여드리는 것에도, 어쩌면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상이 이 번 시집에 대한 개인적인 소개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 속에서 처음 소개해 드리는 시는, 〈쉽게 씌어진 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얼마 전에 그림을 좀 쉽게 그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런 방법을 궁리하던 중에 문득 이 시가 떠올랐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떠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쉽게'라는 말이 같았기에 떠오른 것이었죠. 또 시인이 이 시에서 '쉽게'라는 말에 담은 상황과 의미도, 단순히 시 자체를 '기능적으로 수월하게 썼다는 것 이상의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림을 조금 더 수월하게, 그래서 조금 편하게, 그릴 수 있는 실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서의 '쉽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한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창작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가졌던 고민과 심상 속 어딘가에는, 필자의 고민과 심상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를 읽는 것이 시인과의 깊은 소통이라면, 제가 이 시를 읽으며 그랬듯이, 윤동주 선생님께서도 저의 그림과 글들을 보면서 조금은 공감해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자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이 시를 소개하게 된 하나의 이유, 아니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윤동주 선생님으로부터는 불가능하더라도, 여러분으로부터는 지금도 가능할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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