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가온 백제와 부여의 의미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이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도시다. 한강 유역에 세워진 백제는 이후 공주를 거쳐 부여로 수도를 옮기며 고유의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이러한 공주, 부여, 익산 일대를 통합하여 2015년에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그중 부여의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당일치기로 여행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들로 코스를 구성했기 때문에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은 제외하고 둘러보았다.
예전부터 부여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백제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에 '백제'라고 하면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해서 깊게 생각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영토를 넓혀나간 고구려를 응원하고, 삼국 통일을 이루어낸 신라의 전술에 놀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승자의 강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패자의 가치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다시 바라본 백제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국가와의 외교 활동이 활발했고 공예 기술이 뛰어났으며 특유의 건축 기법을 발전시킨 나라였다. 따라서 백제의 흔적을 직접 보며 더 알아가고 싶어졌다.
부소산성으로 올라가기 전에 얼핏 보면 광장인가 싶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는데, 여기가 관북리 유적지다. 부여가 백제의 수도이던 시절 왕궁이 있던 자리이며 그 뒤의 부소산은 이 왕궁을 지키는 성곽이자 후원으로서 역할을 했다. 건물과 창고, 연못 등이 있던 흔적만 있을 뿐이어서 안내판을 보며 예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듯이, 터만 남은 이 공간에 긴 시간이 흐르며 역사가 여러 번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창경궁의 명정전이 조선시대의 광해군 시절에 복원된 후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해서 오래된 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만일 여기에 백제시대의 구조물이 온전히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만 같다. 빈 터에 서있는 기와 건물은 조선 때 지어진 부여현 관아이며 백제시대의 주춧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를 배우고 있는 모습이 담 너머로 보였다.
부소산성에 올라 낙화암으로 가던 중에 삼충사를 발견했다.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지었으며, 영정을 모셔두고 매년 문화제가 열릴 때 제를 올린다고 한다. 세 인물 모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충과 흥수는 문신으로서 의자왕에게 나라를 돌볼 것을 건의하다가 투옥되거나 유배되었음에도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충언을 하였다. 계백은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희생시키고 백제의 운명이 달린 황산벌 전투에 참전했다는 일화가 워낙 극적이어서 듣는 순간 잊어버리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부소산성은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고 길도 넓어서 산책하듯이 오를만 했다. 중간에 나오는 갈림길마다 표지판이 잘 되어있어서 따라가기도 쉬웠는데, 간혹 기존에 조성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만들어진 듯한 길을 지날 때면 과연 여기가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길눈이 어두운 편이라 대로변에서도 간혹 헤매는 데다가 풀과 나무만 있는 곳이라 더 애매했지만 길이 복잡하지 않아서 괜찮았다. 하늘도 보고 나무 향기도 맡고 꽃도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올랐다.
걷다가 '반월루'라는 누각의 2층에 올라가 봤더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보이는 백마강의 모습이 반달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자가 보이면 워낙 그 모양새가 자연과 잘 어울려서 외관의 모습만 사진으로 찍고 돌아서고는 했다. 그런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지점에 누각을 세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호기심이 생겨서 반드시 올라가 확인해보고는 한다. 부소산성을 걸으며 경치가 내려다 보이지는 않았는데 여기에 오니 전망이 워낙 좋아서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월루에서 본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이번에도 기대하며 올랐지만 누각의 계단이 꽤나 가파르고 좁아서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막상 나무가 울창해서 시야가 잘 트이지는 않은 바람에 아쉬웠다.
1919년에 조선 관아의 정문을 옮겨와서 지은 사자루에는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름이 상당히 긴 편인데,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명복을 빌며 만든 불상이다. 따라서 금동으로 제작되어 정지원의 명문이 새겨진, 석가여래 삼존불이 서있는 모양의 불상이라는 의미다. 흥미롭게도 부소산성에서 발견은 되었으나 정지원과 그 아내의 성씨가 백제에서 확인되지 않은 성씨어서 반드시 백제의 유물이라 보기에는 어렵다고 한다.
낙화암에 도착해서 백화정에 들렀다가 그 옆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백마강을 바라봤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데다가 주변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경치를 즐기기에 너무나 좋았다. 한참을 내려다 보아도 질리지 않았고 마음이 시원해졌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낙화암으로 소풍을 갔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친구들과 북적북적 왔다가 휘리릭 보고는 선생님을 따라가기 바빴기 때문에 경치를 여유롭게 즐기지 못해서 머리에 남아있지 않은가 보다. 어릴 때 소풍 외에는 여행을 갈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 즐거움을 잘 알지 못했고, 보통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움직이다 보면 해당 장소에 대한 의미가 크게 와닿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야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요즘은 학기 중에도 학부모가 미리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해두고 아이와 함께 며칠 동안 현장학습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듣고 부러웠다. 어릴 적부터 많이 보고 들으면서 경험을 쌓아두면 아무래도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낙화암에서 내려와 황포돛배를 타고 부소산성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여행할 때 기회가 된다면 꼭 즐기는 것 중에 하나가 유람선이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배의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멋있었다. 약간의 해설과 트로트 음악이 함께한 독특한 15분의 여정이었다.
해설 중에는 백마강의 전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나라의 장군이던 소정방이 이 강을 건너 백제를 침공하려 했지만, 용이 되어 강을 지키던 백제왕으로 인해 비바람이 불어서 더이상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한 노인이 그 백제왕이 좋아하던 음식이 백마 고기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소정방은 이걸 미끼로 용을 잡아서 침략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마음이 좋지 않은 전설이어서 그보다는 다른 내용의 해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색해 보니 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금강을 '백강'으로 표기했으며 옛날에는 '말'을 '크다'는 의미로 써왔기 때문에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세계역사도시 시장군수대회가 있어 참가했는데 내가 부여에서 왔다고 하니까 죄다 멸망한 나라의 수도에서 왔다고들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화가 나서 '멸망하지 않은 고대국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역사도시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응수했죠. 꼼짝들 못하데요." - 유홍준,『나의문화유산답사기6』 p.353
유홍준 교수에게 어느 부여군수가 찾아와 한 말을 읽고 웃음이 났다. '그러게, 한반도의 많은 국가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유독 백제는 멸망한 나라 이미지가 강한 이유가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거기에 큰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낙화암인 듯하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부여성을 함락하자 삼천궁녀가 강물로 투신했다는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뛰어내렸을까, 무섭지는 않았을까 하며 감정을 담아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위기에 처한 백제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자리잡는 것이다.
사실 낙화암에 얽힌 이 이야기는 전설처럼 구전되다가 삼국유사에 수록되었으나, '삼천명'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정당성과 의자왕의 방탕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의자왕은 비록 말년의 실정으로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효자인 데다가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유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고구려와의 교류와 전술로 신라를 제압하던 군주이기도 했다. 또한, '삼천명'은 당시의 백제가 거느리기에는 불가능한 궁녀의 수여서 아마 '아주 많다'는 의미였을 것이라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 '백만 년 만에 만났네'라고 할 때의 그 '백만'처럼 쓰이던 용어인가 보다.
이전에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가 낙화암에 들렀다 백제 여성들의 정절을 부각하는 해설을 듣고 수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방송을 보고 그동안 낙화암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았다. 보통 낙화암의 전설에 대해 '궁녀들이 적으로부터 능욕당할 것을 피하기 위해 투신했다'라고 설명한다. 그보다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저항 의지로 자결을 택했다'는 내용으로 당시의 백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책임감을 전달하는 편이 현대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데 더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는 당시에 그들이 살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한 여성들이 있었고, 지금의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에 익숙하다. 낙화암의 전설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애국심보다 정절에 방점을 찍어 설명하는 건 공감하기 어렵다.
선착장에 다다르며 음악이 잦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배가 물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주욱 한 시간은 더 타고 싶었지만 금방 내려야 해서 아쉬웠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낙화암과 부소산성에서 백제의 흔적을 살펴보고 한 나라의 마지막과 후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역사 이야기나 유적지라는 사실 외에 풍경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