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자를 찾아라

by 가브리엘의오보에
사람 간에 뜻이 통함은 말을 잘하고 못함에 있지 않습니다. 서로의 마음에 다가가려 한다면 말이 없고 글이 없어도 아무런 흠이 되지 못합니다.

이정명 ‘뿌리 깊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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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자를 찾는 기준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했지만, 이 이상의 표현은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반려자를 찾고 있다.


반려자는 적어도 지금까지 필자가 사는 세계에서 ‘결혼 상대자’를 일컫는 단어다. 평생을 함께 하는 존재 혹은 상대를 반려자라 했다. 그리고 남과 여는 양과 음으로 표현되고, 태극의 모양대로 양의 양각은 음의 음각과 음의 양각은 양의 음각과 결합되어 하나의 원, 즉 한 없이 완벽에 가까운 결합이 된다. 이 관계에서 상대를 자신의 반려자라고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반려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난 사이라도 일정 기간 교류를 가져 좋아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때 반려자라고 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의식으로 양가 친지에게 평생을 함께 한다 공언하면서 반려 관계의 상징인 가정을 이룬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데도 돌아서 서로에게 등을 보이는 반려 관계가 많았다. 서로 등을 보일 때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 누군가 배신을 했다, 집안 간 서로 간 맞지 않음이 갈등으로, 갈등이 싸움으로 번져 서로 등을 보였다. 심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헤어지게 될 때 기록되는 이유가 서로 등을 보인 공식적 이유가 된다. 사랑이나 좋아함이란 애정 만으로 반려 관계의 유지는 어려운 것일까?


필자가 반려자를 찾는 기준을 나타내는 표현을 고민할 때 생각했다.


반려자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말이나 글, 혹은 상징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서로가 하려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이 평생의 반려가 되는 것이 맞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유사한 관계로 ‘절친’을 생각했다. ‘나의 절친’이라고 대내외에 공언하는 경우, 상대와 손발이 맞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의 고민과 기호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도 표현한다. 형제나 자매보다 어쩌면 가족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반전은 절친도 어떤 기회에 헤어지는 사례도 있다. 이런 사례는 왜 발생하나? 좋아하고 사랑하며 마음까지 맞는데 왜 서로 등을 보일까? 각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서? 즉, 지금까지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인내의 범위 안에 해당됐기 때문에 참을 수 있어서? 혹은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상대에 대한 진심어린 헌신의 순간에 잡은 손을 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실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헤어진 것인가?


우선, 여기까지 이야기한 내용만 정리해 보자.


1.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의 조건은 내가 상대에게 전하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내가 가져야 할 태도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진위를 알아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 내 안에 상대를 담아낼 그릇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그릇을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이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진위를 알아보는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라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성숙된 마음을 내가 갖는 것이 내가 누군가의 반려자가 될 조건이다.


2. 서로에게 헌신해야 한다.


반려란 무엇일까?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가는 관계일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두 사람 앞에 닥쳐오는 온갖 희로애락 喜怒愛樂, 패배와 승리, 실패와 성공을 함께 맞이하고 헤쳐 나가기 위해 서로 박자가 맞고 손발이 맞으며 호흡이 맞아야 한다. 상대의 장점으로 나의 단점이 보완되고 나의 장점으로 상대의 장점이 더욱 향상시킨다. 나의 장점이 상대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의 장점이 나의 장점을 더욱 향상시킨다. 이렇게 상대에게 헌신, 조건 없는 투자를 할 마음가짐이 있고 이를 기꺼이 실천한다.


3. 말과 글을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맞아야 한다.


“니가 말을 하지 않아 몰랐잖아”라는 말을 들으면 ‘그동안 넌 어디를 보고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떻게 너만 보고 살아?”라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에게 눈을 떼지 않아야 겨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사람이 협업하여 일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소위 ‘쿵짝이 맞는 사람’. 함께 일하고 싶은데 손발이 맞지 않는 사람. 기쁨은 함께 해도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아예 옆에 오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는 사람. 나와 쿵짝이 맞는 사람이 반려의 조건을 서로 나누는 상대이다.


필자는 반려 관계 형성의 최소 조건은 위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100명의 사람들은 100가지 삶을 살고 있으므로 일반화할 수 없다. 다만, 최소한 위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후에 내 삶이 가진 특성에 따른 조건이 형성되지 않을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상대가 가진 장점 중 한 가지에 강한 영향을 받는 경우다. 마치 그 조건 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아니 이런 생각조차 못하는 상태에서 반려를 결정하는 경우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필자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나의 행복을 위해 깐깐하고 엄격한 이기적 존재가 기꺼이 되고자 한다. 아직도 필자는 이해력이 부족하다. 아직도 필자는 자신의 세계관을 열지 않고 상대를 대한다. 당연히 불협화음이 난다. 다행인 것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간만큼 부르르 떨지 않게 됐다.


필자는 ‘장유유서 長幼有序’, ‘어른을 공경’할 때의 ‘어른’이란 ‘나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사는 세계에서 흔히 보는 사례는 ‘나이 많은 사람’, 즉 세상 경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 세상 경험이 적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해 달라’라고 말하는 경우, 이 ‘나이 많은 사람’을 ‘나이만 많은 사람’, ‘나이만 많은 어린아이’라고 규정한다. ‘규정한다’라는 동사 때문에 필자가 매우 편협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어른은 ‘마음이 성숙한 사람’이 아닐까? 내가 반려자가 되기 위해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반려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숙성할 필요가 있다. 감정에 휘둘리고 진위를 가릴 통찰이 없으면 그 누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래서 반려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성장시킴에 쉼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필자는 반려자와 반려 관계가 ‘결혼’이라는 의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친구가 반려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 하는 친구. 비혼, 미혼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결혼’이 반려 관계의 걸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반려자가 나와 성별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반려 관계를 맺고 남은 인생을 서로 마음을 나누며 평생 함께 하는 사람이 결혼상대자여야 할 당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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