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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Aug 12. 2022

대학 결과 발표를 받아든 기분

전산 오류라도 난 것이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가

대학 결과 발표 메일을 찾으며 메일 내용 어디든 ‘Congratulations! (축하합니다!)’나 그 비슷한 말을 찾고자 쭉 눈으로 내용을 훑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unfortunately (유감스럽게도)’라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메일의 내용을 못 본 것처럼 황급히 다시 일기를 쓰던 워드 화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불합격 통지를 봐버린 이상, 며칠 전까지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할 맛이 더 이상 날 수는 없다. 워드에 밀린 일기를 다시 쓰는 대신 '젠장'과 '어떻게 해야 하지' 따위의 말들을 써놓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빠가 집에 왔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순간 얼떨결에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거짓말해 버렸다. 일상적인 안부 인사처럼 결과를 묻는데 "불합격"라고 말을 전하기가 좀 힘들었다. 어쩌면 나로서도 결과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대로 계속 그렇게 숨기고 있을 수도 없는 것 같아 아빠를 다시 불러 결국 말씀을 드렸다. 아빠는 한참 그 이메일 내용을 보다가, 그 메일 내용 본인 이메일 주소로도 전달해 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 뭐 이런 내용을 전달받아'라고 나는 마음속으로만 괜히 볼맨 소리를 다.


전혀 태연하지 못한 상황에서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는 게 힘들었다. 울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는 “나가려고? 밖에 엄청 춥다” 정도의 경고를 주셨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밖을 나섰다. 밖이 춥든 말든 알 바가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일단 나가서 바깥공기를 마셔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래야 무슨 판단이 서고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를 확인하셨는지 답장이 왔다. 왜 안 된 것 같냐고 물으셨다. 아씨, 건 내가 알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밖에 걸었다가 오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가 이내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밖에 나가서 걸었다. 목적지도 뭐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중간중간에 눈물이 고였다. 솔직히는 ‘믿기지 않는다’가 첫 반응이었던 것 같다. 사람 마음이 참 웃긴 게, 불합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닌데도, 마음 한편으로는 내심 잘 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합격 소식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실날의 희망을 놓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이메일 한통으로 그 희망은 와장창 깨지고, 나는 확인사살을 당해버렸다. 이대로 끝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나는 신이 나를 위해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개구멍이라도 만들어 놓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에이, 설마, 이게 정말 이대로 끝이겠어?' 하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었다. 전산 오류라도 난 것이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가. 내가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운과 요행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내가 마치 이 세상의 중심이기라도 한 것처럼 단단히 착각하게 된다.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주인공에 빙의라도 된 것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서라도 살아날 구멍이 매번 마련될 줄로만  거다.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 있을 만한 노력을 하지도 않고 그런 행운이 오기를 기대한 내 자신이 웃겼다. 돌이켜 보니 그렇게 상심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 한들 그간 12년 간의 학교 시절이 전부 그 합격, 불합격 여부로 정의되고 끝맺음 지어져 버린다는 게 불합리하지 않나 싶은 원망도 들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머릿속이 쉽사리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아빠가 말씀하신 그대로 날씨가 정말이지 엄청나게 춥고 쌀쌀했다. 생각이 정리가 되려면 몇 바퀴고 더 걸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걷기에는 말도 못하게 추웠다. 귀에는 내가 다운받아 놓은 <너의 이름은> OST '아무것도 아니야 (なんでもないや)'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허벅지가 정말이지 얼어붙을 것만 같이 추워서 따갑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한 정거장 거리 정도는 걷고 싶은 오기가 들어서 지하철 역 입구 앞에 익숙한 안경점이 보일때까지 걸어갔다. 안경점에 붙어 있던 광고 속 모 연예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얼얼한 기억이었다.


집에 돌아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어 돌아왔다. 하지만  들어오는 순간 느껴진 따스한 온기순간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그만큼 밖이 무지막지하게 추웠으니까......


엄마가 해야 할 얘기가 있지 않겠냐며 내게 식탁에 빨리 앉아 보라고 하셨다. 불편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아빠 엄마와 마주 앉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설적인 시간을 가졌다. 안개처럼 뿌옇게 느껴졌던 불확실성 속에서 혼자 헤매고 힘들어하던 시간보다 더 현실적인 위로가 되었다.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길을 다시 찾게 된 것만 같았다. 불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야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엄마가 대학 입시에서는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아쉬움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이걸되었다고 만족해하기로 했다. 정말 이걸로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써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기분도 칙한데 집에 있지 말고 다 같이 부산에 가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렇게 칠 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부산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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