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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Oct 13. 2023

독일 생활 6년,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독일 취업 설명회를 다녀온 후


독일 대학의 방학이 끝나간다.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인 이번 주는 집순이인 나에게 너무나 벅찬 스케줄이었다. 월, 화, 수 모두 일을 했고 목요일에는 가고 싶은 취업설명회가 있었고, 금, 토, 일은 연수를 가기 위해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다. 그리고 그다음 주는 바로 새 학기의 시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기 기운까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몸을 생각하면 취업설명회를 가지 않고 그냥 쉬는 게 맞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어쩐지 이상하게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안이나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때문이 아니라 어떤 회사들이 있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과 그곳에서 내가 얻을 생각들에 대한 기대였다. 몇 달 전에 갔었던 취업 설명회의 경험이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취업 설명회가 열리는 장소도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취업설명회가 열리는 곳은 함부르크 시청 뒤편에 위치한 한델스카머(Handelskammer)라는 곳으로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상공회의소 같은 곳이다. 함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이며, 유명한 장소이다.





다행히 날씨도 좋아서 나온 보람이 있었다. 취업설명회는 무료이지만 미리 등록은 필요했다. 등록을 한 줄 알았는데 QR코드가 없었다. 부랴부랴 문 앞에 서서 다시 등록을 하고 입장을 했다. 역시 오길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설명회 자체가 디지털이 주제라서 IT/디지털 분야를 중점으로 한 회사들과 대기업 몇 군데가 있었다. 흥미로운 건 군대에서도 홍보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게임 전시회에서 독일 군대에서 홍보를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독일은 군대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홍보나 광고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한국인으로서는 꽤나 신기한 장면이다. 취업 설명회에 오면 보통 무료로 이력서용 사진을 찍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당장 면접을 볼 게 아니더라도 가능한 깔끔한 옷을 입고 가는 게 좋다. 일전에 Xing에서 주최한(한국의 사람인에 해당하는 구인구직 플랫폼) 취업설명회에서는 사진을 바로 보내줬는데 오늘 찍은 곳은 2-3주가 걸린다고 했다. 보정을 하기 때문이라고! 늦게 줘도 보정해서 준다고 하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좀 귀찮아도 줄을 섰다. 물론 그냥 찍어주진 않았고 개인정보를 적고 또 이력서와 커리어 무료 상담을 해준다길래 그 상담 예약도 했다. 예약 확인 메일이 너무 늦게 와서 붕 뜨는 시간이 생겨서인지 상담을 잡아주던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며 어느 나라 이름이냐고 물어봤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한국인은 처음 만나본다며 신기해했다.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외국인 지원자들도 자주 만나는데 중국, 베트남은 자주 보는데 일본, 한국 사람은 잘 못 본다고 하며, 특히 한국인은 드물다며 신기해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 쪽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바로 취업을 해서 오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줄을 섰다. 사진 코너는 늘 줄이 길다. 안경을 쓰고 찍을지 벗고 찍을지 고민하며 셀카 모드로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안경을 벗었다 쓰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연분홍빛 후디를 입은 남학생이었다. 자꾸 말을 걸길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유학생인 데다가 독일에 온 지 보름 된 함부르크 뉴비였다.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한다고 했다. 독일어도 아직 어려워하고, 이제 1학기인데 벌써 이런 곳에 왔냐고 했더니 미리 인턴십을 하고 미리 졸업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조용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붙임성이 좋은 이 학생에게 이끌려 부스 몇 개를 돌았다. 원래는 부스 방문은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얼떨결에 이곳저곳 인사를 하며 짧은 상담을 했다. 기본적으로 독일은 한국보다는 많이 캐주얼한 분위기라서 긴장감은 덜하지만,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긴장감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독일어도 잘 못하면서 영어로 성큼성큼 여기저기 말을 잘 걸었다. 나도 덩달아 내 소개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용기가 나서 독일어로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다 보니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게 되는데 어떤 분이 내 독일어를 칭찬해 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나를 끌고 다니던 남학생은 독일어는 아직 초보 수준이었어서 계속 영어로 상담을 했다. 영어로 상담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몇몇 회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기네 회사는 독일어를 많이 써서 독일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피드백을 주는 것을 옆에서 듣게 되었다. 만약 내가 유학을 선택하지 않았었다면, 독일 대학을 다니지 않았더라면, 이 학생의 모습은 어쩌면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1학기 때의 나도 이 학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번 달로 꼭 유학한 지 3년이 지났다. 3년이 지나니까 이제 진짜 ‘들린다’는 느낌이 들고 ’ 말을 할 수 있게 ‘ 되었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인 ’귀 트임‘과 ’말 트임‘을 넘은 기분을 요즘 느낀다. 각종 회사의 직원들이 나와 회사 소개나 자신들의 직업을 소개하는 강연을 들으면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확실히 예전보다 잘 들린다. 물론 강연은 말하는 사람이 좀 더 크고 또렷하게 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 잘들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정말 많이 듣기가 편해졌다. 진심으로 기쁜 순간이었다.





사실 마음 먹고 찾으면 영어만 쓰면서 일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한 환경의 독일 회사도 여럿 있다. 그런 분들을 직접 보기도 했고, 일하기도 했었다. 독일어는 생존 수준 정도만 하고 영어로만 살 수도 있다. 함부르크, 베를린 등 대도시 한정이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독일어를 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도 제약을 느끼거나 다른 회사로 이직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바로 재취업을 하지 않고 유학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래, 좀 힘들었고, 좀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길로 내가 잘 걸어왔구나,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글은 이렇게 담담하게 쓰고 있지만, 지난 3년 간 독일어는 나를 참 많이도 힘들게 했다. 그래서 이렇게 들리고 말하기가 한결 편하다고 스스로 느낀 오늘이 내게는 꽤 의미있는 날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 것이기도 하고.


졸업을 하고 어떻게 할지도 고민이 많았었다. 계획대로면 1년 정도 더 학교를 다니고 졸업부터 해야한다. 그리고 독일 대학은 졸업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래도 1학기 때만큼 커다란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불안에 움츠러들진 않는다. ‘쉽진 않겠지만 할 수는 있을 것 같아’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취업 설명회에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평소에 알고는 있었지만 내 직업으로 고려하지는 않았던 직업에도 관심이 생겼다. 석사 공부도 하고 싶지만 돈을 생각하면 취업을 해야할 것 같아 아직 고민하는 부분은 있다. 그래도 전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하다. 취업설명회에 가서 내 얘기를 해보고 상대방의 반응을 보다보면 피드백 수집도 되고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되서 나에게는 당장 잡을 얻는게 아니라도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아무 것도 한 거 없이 벌써 6년이 넘었다고. 워홀 1년, 어학준비 2년, 유학 3년. 잘 하고 싶었던 구매 대행도, 블로그도, 유튜브도, 브런치도, 책을 내려던 결심도 어느 순간 흐지부지해져버렸다. 한 번 뿐일 독일 생활을 기록으로 잘 남겨두고 싶었던 그 계획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또 그 모든 게 다 내 욕심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유학도 잘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기록도 잘 하고 싶고 다 잘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며 덤덤한 마음으로 반성하는 밤을 가졌었다. 그런데 오늘 취업설명회에 다녀오면서 생각이 조금 바꼈다. 아, 7년 동안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구나. 독일어는 입도 뻥긋 못하던 내가 이제 그래도 어디가서 독일어를 할 줄 안다고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고, 몸도 마음도 전보다 훨씬 많이 건강해졌다. 불편한 일을 겪어도 전보다 훨씬 빨리 털어버리게 되었고, 우울한 시간에서도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늘 미루고 불규칙하게 살던 내가 이제는 조금씩 미리 준비하고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고 삶에 루틴을 만들며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하고 기특한 나의 작품. 그건 ’지금의 나‘ 구나. ’2023년 10월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ps. 예전에는 나도 한국에서 주최하는 ‘해외 취업 설명회’만 주로 갔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로컬 취업 설명회를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보통 회사 정보는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보면 되긴 하지만 설명회에서 직접 부스를 방문하면 그 회사의 느낌, 분위기를 아는 데에도 훨씬 도움이 되고, 가볍게 상담을 하면서 회화 연습도 할 수 있다. 굿즈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은 덤이다. 관심있는 분들이 있다면, 독일 취업 설명회에 대해서도 상세히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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