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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Dec 04. 2023

눈은 자신을 얼려 다른 이들의 마음을 녹이고

또한 자신을 내던져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게 한다



요즘 함부르크는 눈이 자주 온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평소보다 한 뼘 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함부르크는 겨울에도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잘 없어서 눈이 흔한 곳은 아니다. 그래서 더 설레는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에 늘어선 크리스마스 마켓과 따뜻한 노란 불빛들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데 새하얀 풍경까지 더해지다니. 폭설로 고생하는 다른 지역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이다가도, 기후 변화가 이렇게 함부르크를 춥게 만들었구나 걱정이 되다가도, 눈앞에서 소복소복 쌓여가는 눈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외국인청을 다녀왔다. 벌써 일 년이 지나서 어느새 비자를 연장할 때가 된 것이다. 10월부터 방문 예약을 신청했는데 두 달 동안 감감무소식이더니 갑자기 2주 뒤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더랬다. 벌써 7년째, 1년에 한 번씩 가는 것인데도 영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12월은 피하고 싶었지만, 연말연시 공무원 휴가에 끼어 예약이 너무 늦어질까 봐 평소보다 한 달 일찍 예약을 잡았더니 덜컥 12월 초가 돼버렸다. 안 그래도 바쁜 12월 일정에 다음 날이 외국인청 방문하는 날인 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저녁 부랴부랴 준비물을 챙겼다. 필요 서류를 온라인으로 이미 업로드했음에도 굳이 굳이 출력해 오라는 안내문에 아침 일찍 학교로 달려가 모든 서류를 출력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탔다. 잘 준비해 가도 긴장되는 곳이 외국인청인데 급하게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허겁지겁 정신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급한데 눈은 아무 말 없이 한결같이 내렸다. 물론 눈도 그 걸음을 서두를 때가 종종 있지만, 오늘 아침의 눈은 차분했다. 아침부터 학교를 들어갔다 나왔다 또 외국인청으로 향하는 내내 모자며 목도리며 눈이 쌓이고 또 쌓였다. 털어내는 눈은 차갑고 손도 차가워 몸은 추운데 마음은 따뜻했다. 추운데 따뜻했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랬다. 추운데, 따뜻했다. 추운데 따뜻한 이런 몽글몽글함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떠오르는 풍경들을 찰칵 사진으로 남겼다. 다행히 예약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은 자신을 얼려 다른 이들의 마음을 녹이고
또한 자신을 내던져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게 한다.
- 노이 -






원래도 눈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눈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대단하다고도 느껴졌다. 눈은 자신을 얼려 다른 이들의 마음을 녹이고, 스스로를 바닥으로 내던짐으로써 다른 이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꽁꽁 언 눈이 쏟아지는 모습, 그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하얀 세상을 보며 마음이 이렇듯 녹아내린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득 걷던 걸음을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는 것 또한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내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방울은 작고 약한데, 그 방울 방울이 모여 나뭇잎부터 빌딩까지 도시 전체를 하얗게 덮어버리고야 만다.





눈방울처럼 작고 약해 보이는 나의 글들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다 보면 어느 곳엔가 쌓여 누군가의 기억 한 켠에 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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