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맞이하는 일곱 번째 크리스마스
올 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왔다. 독일에서 맞이하는 일곱 번째 크리스마스다. 미국 못지않게 독일도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나라인지라 늦어도 11월 말부터 거의 한 달 동안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젖어지낸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여기저기 열리고 화려한 조명과 높이 솟은 트리가 도시 곳곳을 장식한다. 작년부터는 하루에 하나씩 상자를 열어보는 아드벤트 캘린더도 시작했다. 노래를 들을 때도 괜스레 캐럴이 듣고 싶고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스포티파이 메인에는 캐럴 리스트가 자신을 눌러달라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오던 크리스마스 당일은 어떨까? 독일은 원래도 일요일에 대부분의 가게나 식당, 카페가 문을 닫는 문화인지라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당연히 다 닫겠지 생각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올해는 궁금해져서 시내로 산책을 나갔다. 대부분의 레스토랑, 카페, 상점 등이 문을 닫았다. 크리스마스 마켓도 아직 남아는 있지만 문을 연 곳은 없었다. 스타벅스나 에스프레소 하우스, 맥도널드 같은 몇몇 유명한 식당이나 카페가 주로 문을 열었고, 종종 짧게나마 문을 여는 개인 카페들도 눈에 띄었다. 여행객들을 위해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중앙역은 대부분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예상 밖으로 거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그들을 눈여겨보고 있자니 대부분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 즉, 독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게다. 쉬는 날이라 뭔가 하고 싶은데 문을 연 곳은 마땅치 않고, 그런데 또 날씨는 좋고, 어디든 걷고 싶은 사람들이 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이 나가자고 보채서 나온 것 같은 가족들도 보였다. 길거리에 외국인이 많은 까닭은 독일의 크리스마스라는 건 대부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날인데, 우리는 가족이 이곳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아버지가 ‘우리 딸 가족들 보고 싶어서 우짜노’라고 하시는데, 처음에야 그랬지만 사실 유럽 살이가 길어지면 가족이 가장 그리워지는 날은 설날이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돼버린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일곱 해를 겪으니 무덤덤해진다. 아니 오히려 조용히 쉴 수 있어 12월 중 가장 평온한 날이 되었다. 공부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만나자는 사람도 없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셀프 크리스마스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도 간다. 한국에 가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기도 한다. 나도 다음번에는 여행이나 계획해 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정말 그냥 쉬고 싶었다. 유난히 버거운 12월이었다. 일이나 공부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람 만나는 약속이 많아 힘들었다. 남들이 보면 ‘그게 많다고?’라고 할 정도지만, 평소에 사람을 잘 안 만나는 나에게는 벅찬 스케줄이었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에는 불러주는 사람도 만날 사람도 별로 없어서 사무치게 외롭기도 하고 우울한 시간도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만나자고 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새 또 그런 혼자만의 시간에 적응이 된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은 탓에 놀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인지 어쨌든 감사한 마음을 넘어서 힘들었다. 이런 마음을 종종 뵙는 스님께 조심스레 털어놓았더니 무릎을 탁 치는 답을 주셨다. “일도 잘하고 싶고, 인간 관계도 잘하고 싶고, 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것 같네요.” 그랬다. 결국은 다 잘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구나. “일이나 공부가 더 중요하면 그걸 선택하세요. 대신 결과에 책임을 지면 되지요.” 결국은 선택과 집중이구나.
머리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삶의 패턴을 아직도 반복하는, 나는 아직도 미련한 중생이구나, 마음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아직 더 해야 할 마음공부도 많구나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버겁다 느껴진다면, 지금 나에게 일과 공부가 더 중요한 시기임을 인정하고, 지인들에게 그저 설명하고 내년을 기약하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기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해도 자주 만나는 것은 버거워하는 나라는 사람의 성향부터 스스로 인정해 주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인간관계를 내 방식대로만 이어가다가 모두가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무섭다면, 지금 방식을 바꾸든 아니면 적적한 노년을 감내하든 둘 중 하나를 하면 될 일이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어쩔 땐 생각보다 간단하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출발해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휴를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