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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Jul 03. 2021

콘텐츠 에디터 회고록

7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1년을 못 채우고 나오는 게 말이 돼? 싶다가도, 두 달 정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니 빨리 나온 걸 후회하진 않는다. 대신 짧고 굵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5년의 브랜드 기획 경력이 있었지만 에디터는 처음이라 신입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해보는 업무가 익숙하지 않겠지만 지금껏 쌓아온 일머리로 수월하게 해내길 스스로 바랬다. 기대와 다르게 감을 잡느라 헤매기도 했고,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부끄럽고 속상한 날들도 제법 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해왔던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순 없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일, 매력적인 카피를 만드는 일, 사용자의 경험 맥락을 파악해 콘텐츠를 구조화하는 측면에선 비슷했다. 다루는 콘텐츠의 형식과 채널이 다르고 산업군이 달라지고 상대하는 타깃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에 동기화만 잘하면 되는 샘이었다.   



나는 주로 상세페이지와 인스타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맡았고, 제품 촬영 지원, 택배 발송을 위한 제품 포장 등의 업무도 했다. 다 같이 와인잔 300개 포장했던 일을 생각하면 조마조마 짜릿짜릿

가장 포션을 많이 차지한 건 아무래도 콘텐츠 기획이었으니,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정리하며 배운 점과 느낀 점을 회고한다.


내 책상 앞 포스트잇

쉽고, 알차고, 재밌는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펀샵처럼 약간의 B급 감성으로 재미나게 푸는 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톤을 잡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정된 인적 자원과 시간을 고려하면, 마켓 컬리처럼 모든 사진을 멋지게 찍을 수도 없었으니까 최대한 설명 부분에서 친절하게 풀어쓰고 우리의 강점인 콘텐츠력(?)을 보여주자! 싶었다는 점을 앞서 밝힌다.



배운 점


0. 제품을 써보고 콘텐츠를 쓰면 디테일이 달라진다.

제품을 써보고 콘텐츠를 작성하는 것과, 기존 자료나 후기에만 의존해서 콘텐츠를 작성하는 건 천지차이다. 표현의 디테일이 확실히 다르다. 특히 식품의 맛과 식감, 디퓨저나 인센스 스틱의 향, 인테리어 소품의 컬러감을 표현할 때 실물을 직접 써보는 것과 안 써볼 때의 차이가 많이 났다.



시나몬 향을 입힌 달달한 견과류를 먹었는데,

같이 먹은 팀원들끼리 애플파이 맛이 난다는 말을 나눴다.

'향긋한 시나몬 향이 솔솔~ '로 퉁 칠 수도 있었지만
-> 달큰한 애플파이 맛이 나요

이런 비슷한 말로 썼던 기억이 난다.

경험하면 구체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눈앞에 그려지도록, 사람들이 생각을 덜하도록, 제품 실물을 경험해 보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다.

단, 너무 개인적인 주관이 많이 들어가면 곤란하다. 공감 가능한 수준에서 써야지 너무 심취해서 쓰면 그건 오버한 리뷰에 가까운 거다.



1. 오해의 소지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자.

일반적인 커머스에선 제품 거래처에서 제공하는 상세페이지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편이다. 우리도 그대로 쓰자니 차별성도 없고, 잘 기획된 페이지도 있었지만 아쉬운 페이지도 많아서 공수를 들여서라도 새로 포맷을 만들고 내용을 재구성했다.


정확하게 제품의 기능과 효과를 전달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이커머스 특성상 상품을 직접 볼 수 없으니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려 했고, 잘못된 정보 전달은 고객의 만족도, CS 업무와도 직결되므로 단어 하나에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쓰라린 기억을 꺼내보자면,

‘세계 3대 와인잔 A의 B' 란 문구로 실수한 적이 있다.

세계 3대 와인잔으로 인정받은 건 A라는 브랜드고, 우리가 판매하는 제품은 B라인의 제품이었다.


자칫하면 소비자는 '와! 이 제품이 세계 3대 와인잔으로 선정된 와인잔 이래!'로 오해할 수 있는 포인트였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단어 사이 수식 관계로 문장의 뉘앙스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걸 실감했다. 과장 광고로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급하게 디렉터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했던 일화는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하다.



2. 쉽게 쓰자.

컨셉진 에디터 스쿨에서 편집장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초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써야 해요.


개인적으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였다. 일반적인 상세페이지에선 전문 용어를 아무 설명 없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소재 명칭, 인증 기관 등에 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주를 추가했다. 각주를 달 정도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단어 앞뒤에 설명을 보탰다.


예를 들어 MDF라는 용어만 쓰는 게 아닌, ‘일반 가구에 많이 쓰이는 MDF 합판’ 이런 식으로 풀어쓰는 식이었다.



용어 설명 이외에도, 제품명을 표기할 때 사람들이 더 많이 쓰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려 노력했다.

차를 우려 마실 때, 찻잎을 거르는 용도로 쓰이는 '티 스트레이너' 상세페이지를 쓴 적이 있었다.


티 스트레이너라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살짝 당황했다. 나부터 제품을 완전히 이해해야 고객을 위한 콘텐츠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처음에 제품을 이해하고 차 마시는 경험을 상기시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찻잎을 뜨고 거를 때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스마트한 제품인 만큼, 차를 잘 모르지만 입문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용어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래처가 쓰는 제품명을 그대로 쓰는 걸 원칙으로 가져가되, 경우에 따라 더 쉬운 표현이 있다면 바꿀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의견 조율을 했는데, 바꾸자!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근거가 필요한 법. 퀵하게 근거 자료를 만들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 콘텐츠가 몇 개나 나오는지 검색했다.


[티 스트레이너 vs 차 거름망]


차 거름망이란 단어가 더 많이 쓰여서, 티 스트레이너 대신 '차 거름망'으로 상세페이지를 썼다.

광고성 글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말을 더 많이 쓰더라~라는 차원에서 확인하는 용도였고, A/B 테스트를 한다거나 제품명을 다르게 언급한 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나 확인할 순 없었지만, 사용자를 배려하는 기획은 이런 단어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혼자 만족했던 사례였다.



3. 맥락! 맥락! 맥락!

좋은 점에도 순서가 있다.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나열하는 게 읽기 편하고 흐름도 자연스럽다.


제품을 언제, 어떤 상황에 쓰는지, 장점은 많은데 어떤 포인트가 사람들에게 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상세페이지 스크롤을 내리기 전에 장점만 요약해 주는 코너와 상세페이지 화면으로 넘어가기 직전 헤드 카피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상세페이지 본문의 뼈대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더 중요하군? 제품의 종류와 주요 기능에 따라 순서에 차이가 있지만, 몇 개 쓰다 보니 감을 익혔다.



필로우 미스트

순서: 탈취, 벌레 기피, 방향을 한 번에 해결! > 성분도 믿고 쓰세요!> 향이 좋아요! > 대용량이라 오래 써요!


→ 잠이 잘 온다는 포인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소구 하는 다른 제품들이 많기도 하고, 이게 수면제도 아닌데 그저 그런 성분이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일 뿐인데 부풀려 얘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 제품의 강점은 성분 덕분에 탈취뿐만 아니라 벌레 기피까지 되는 점이라 만능임을 가장 최상위 장점으로 두었다. >  화학 용품이고 피부에 닿을 수도 있는 거니까 성분이 안전하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두 번째 포인트로 배치했다.


카피: 침실에 방해금지 모드



종이로 만든 가구:

순서: 가벼워서 옮기기 쉬워요! > 어른이 올라가도 거뜬! > 물에 쉽게 안 젖어요! > 폐기비용 안 들어요! > 조립 해체도 간단해요! 


→ 환경을 생각해 만들어진 종이 가구다. 1인 가구, 자취생의 경우 오래 살 집이 아니기도 하고 공간이 좁아서 가구를 들이기가 어려운 데, 이 니즈를 잘 건드린 제품이다. 처음에는 종이로 만들어져 가벼워요!라고만 썼다가, 이 제품 사서 뭐가 좋은데! 를 확실히 전해주는 쪽으로 고쳤다. > 2단계는 의심 없애주기 단계. 어떻게 종이로 가구를 만들지? 당연히 드는 생각은 흐물거리거나 견고하지 않을 거란 불안함이 있는데 이를 상쇄시켜주도록 작성했다.



벼 껍질로 만든 트레이:

순서: 자연을 닮은 무늬와 색감으로 휴양지 기분을 더해요 > 벼 껍질 업사이클링 > 가볍고, 안 깨져요 > 컬러별로 조합해 다양한 연출

→ 보자마자 너무 내 감성이라 참 애정 했던 제품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벼 껍질로 만들어졌다는 포인트인데, 사람들이 소재의 특이성 때문에 사진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예쁜 걸로 어필한 다음에, 근데 소재도 착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예쁘다'라는 말이 간지럽고 뭔가 확실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발리 감성이 난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이 제품은 방콕에서 온 거라 발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벼 껍질을 압축한 무늬가 독특하니까 생김새를 묘사하고, 방콕과 발리의 비슷한 점은 동남아 '휴양지'라는 점을 착안해 설명했다. 그다음 가볍지만 깨지지 않고, 컬러 옵션이 많아서 연출하기 좋은 순서대로 썼다.





느낀 점


처음엔 상세페이지 하나 쓰는데 2.5일이 걸렸다.

점점 줄어서 막판엔 하루 안에 쓸 수 있게 되었다.

한 30여 개의 제품 상세페이지를 쓴 것 같은데, 타성에 젖을만하면 내가 난생처음 접하는 브랜드나 친숙하지 않은 제품을 만나 난이도 조절이 저절로 된 것 같다.


전반적으로 일이 나쁘진 않았다.

재밌었던 포인트는 고객을 배려하는 관점으로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재밌었다. 거래처 상세페이지보다 우리 상세페이지가 훨씬 쉽고 직관적이란 확신이 들었을 때 기뻤고, 다 쓴 페이지를 공유했을 때 거래처에서 정리가 깔끔히 잘 된 것 같다고 피드백을 줄 때 보람을 느꼈다.


혼자 끙끙 앓던 적도 많았다.

1일 차부터 50일이 될 때까지 매일 일에 관해 회고했던 기록을 살펴봤다.


잘하고 싶었다. 경력직이라는 수식이 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싶었고, 에디터로 전향한 내 결정이 잘한 결정임을 믿고 싶었다.



반복돼서 언급된 포인트를 정리해 보자면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자.

-너무 새롭게 만들려고 하지 말자.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바꿀 때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왜 좋은지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옵션을 제시할 때는 옵션 간의 분명한 차이가 나도록 하자. 너무 디테일한 차이로 옵션을 두지 말자.

-레퍼런스를 찾는 것보다 내가 쓸 콘텐츠의 재료를

5번 더 읽고 고민하는 게 빠를 때가 있다.

-Better idea first

-내가 쓴 게 최종본이 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체크하자.



지나치게 꼼꼼하게 보느라 시간을 딜레이 시킨 적이 많았는데, 반대로 빠른 시간 내에 끝내려고 후루룩 쓰다가 오탈자 체크처럼 기본적인 걸 놓친 경우가 많았다.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작아졌지만 계속 의식했다. 어떤 포인트에서 실수가 났는지. 공통점은 방심해서, 나쁜 피드백을 받을까 봐 지레 겁을 먹어서, 내가 틀린 걸까 봐, 너어어무 잘하고 싶어서. 마음이 긴장 상태일 때, 일 하나에 너무 집중하다가 다른 세세한 걸 놓칠 때 등이었다. 일의 내용, 속도, 집중력, 내 마음 상태 모든 게 밸런스를 이뤄야 실수가 없었다.



결론은?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나를 믿고 호흡 조절하며 일하는 훈련을 하면 더 나아질 것 같다.


퇴사일에 받은 한 통의 편지가 기억난다.

“명온님은 사회생활하며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이었어요!”


인사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 말에 뭉클해졌다.

내가 일을 못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함께 일하는 사람을 살피며 일했던 노력들이 헛수고만은 아니었구나.



그래서 콘텐츠 에디터는 계속할 거냐고?

에디터라는 직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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