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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Sep 07. 2017

리부트는 속편을 꿈꾸는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 드뇌 빌 뵈브

<블레이드 러너>가 새롭게 리부트 된다는 소식이다. 제목은 <블레이드 러너 2049>. 전작에서 주인공 데커드 역을 맡았던 해리슨 포드까지 출연한다고 한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꽤나 지난 일이다. 뒷북이다 아주. 어쨌거나 흥미로운 건 제작진이 새로운 리부트 작인 이 작품에 각별한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다. 과거에 해리슨 포드는 본인이 주연을 맡았음에도 그는 작품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리부트 된 이번 작은 시작부터 입을 모은다. 아주 기대할만한 작품이라고. 할리우드 노익장인 그가 단언하는 바라 신뢰가 가는 부분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왼쪽 케이 역(라이언 고슬링), 오른쪽 릭 데커드 역(해리슨 포드)

<블레이드 러너>는 영화의 결말 최종 편집을 두고 말이 많던 작품이다.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감독판과 일반 상영판의 존재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제작진과 배우들 간의 갈등 역시 만만치 않았던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제작비를 깨나 까먹은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인지, 해리슨 포드는 촬영 내내 학을 뗐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 <블레이드 러너>가 재평가될 즈음에서야 자신의 자랑할만한 필모로서 인정했다. 


우리는 지금에서야 잘 알고 있다. 현시대의 수많은 SF영화들의 상상 기재로 활용된 이 영화의 가치를 말이다. 마치 <웨스트 월드>가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로 이어지듯, <블레이드 러너>는 <공각기동대> 나아가서 워쇼스키의 <매트릭스>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 <블레이드 러너>는 저조한 흥행과 개봉 당시에는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 왜 이 영화를 당대의 평단은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우선 그 이유를 이 영화의 바탕에 깔린 난해함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는 레플리컨트가 단순한 복제 인형이 아니라서다. 인조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목적에서 기인한다. 절대복종은 당연한 전제다. 레플리컨트 역시 그렇다. 전쟁용이나 성적 해소용으로 만들어진 걸 보면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이들을 도구로 이용하기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도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외형을 비롯해 생체기능까지 인간과 똑같다. 더구나 최신 모델의 레플리컨트는 인간과 구별이 매우 힘들기를 자랑한다. 


<블레이드 러너>가 원작 필름 K. 딕의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리들리 스콧이 감독이라 그런지 전작 <에이리언>의 AI와 레플리컨트는 유사한 점이 엿보인다. 편의를 위해 제공된다는 이유와 스스로를 인간 같은 존재로 망각한다는 점이 닮았다. 이를테면 <에이리언> 시리즈의 문제를 일으키는 AI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도 마찬가지다. 목적을 가졌지만 인간미에 자꾸 인간미에 치우쳐져 존재 의의를 망각한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블레이드 러너>의 내용은 명백하다. 레플리컨트의 궐기와 이를 때려잡는 것이 목적인 블레이드 러너의 혈투를 그린 추격전 정도로 생각하면 쉽다. 분명, 영화는 그럴 생각이 있었다. 중반부까지 이러한 내용이 당연한 것처럼 이어진다. 문제는 후반부다. 

후반부는 인간처럼 행동해야 할 레플리컨트가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 모순을 내비친다. 그 순간 영화는 몹시 난해해진다. 자신을 잡으러 온 블레이드 러너에게 “나 역시 인간이야”라며 호소해도 모자랄 판에 인간처럼 행동하는 걸 포기하고 인형을 흉내 낸다. 죽여달라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아주 괴기스러운데 후반부에 여자 레플리컨트가 죽기 직전 선보이는 소름 끼치는 팬터마임과 그에 일일이 반응하는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겁에 질린 표정은 극한의 영화의 장르를 망각할 정도로 공포를 연출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는 치밀하게 의도된 레플리컨트의 메시지며 나아가 리들리 스콧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레플리컨트를 잡는 것이 일인 블레이드 러너는 애당초 레플리컨트가 인간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레플리컨트 판별 도구를 갖고 있다. 안구 검사 비슷한 걸로 계속되는 질의를 통해 인간인지 혹은 레플리컨트인지 판별한다. 그들에게 있어 레플리컨트는 이미 인간과 아주 흡사한 대상이다. 

반대로 인형처럼 행동하는 레플리컨트는 그들이 애당초 갖고 있는 분별력을 무색하게 만든다. 자신은 복제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놓고 선전하는 판에 그들이 구태여 판별을 가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블레이드 러너인 릭 데커드는 이상행동을 보이는 레플리컨트를 보고 나서야 그들에 대해 이해를 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다르지만 엇비슷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순간이다. 인형처럼 행동하는 모순이 그를 새로운 시선으로 이끈 것이다. 그 순간 직업적으로만 상대했던 그들에 대한 개념이 전복된다. 그리고 데커드는 더 이상 블레이드 러너가 아니게 된다. 그는 레플리컨트 쪽에 설 각오를 세운다. 

메시지가 하도 전복된 입장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나머지 이 영화의 앞 전개와 뒷 전개에는 묘한 위화감이 있다. 영화가 과연 SF세계관에 기반한 형사물이 맞는지를 고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도 난해함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레플리컨트의 유사성을 결코 동질감에서 찾지 않아서다. 되려 차이에서 레플리컨트라는 존재에 대한 무거움을 알게 한다. 비슷하다고 같이 묶어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달라는 레플리컨트의 깊게 내재된 메시지가 은연중에 들어있다. 이는 엄연히 다른 거다. 동일시 본다는 것과 또 다른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은 말이다. 데커드는 그걸 깨닫게 된 것이다. 어쩌면 <블레이드 러너>의 주제를 암시한다고 알려져 있는 장면 중 하나인 일본인 식당 종업원의 대사 “둘이면 충분해요”는 인간과 레플리컨트 엄연히 다른 두 존재에 대한 지칭이라고 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성공의 키는 전작의 연장에 달려있다. 이는 난해함이 바탕된다는 전제다. 구태여 억지스레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일차원적이면 단순할 것이니 한번 더 꼬아 해석이 필요한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본질을 살리는데 주효할 듯싶다. 다만 여타 작품들의 리부트 전례를 보면 볼거리는 많아져도 곱씹을 거리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도 <컨택트>(원제 <Arrival>)의 감독을 맡은 드뇌 빌 뵈브와 리들리 스콧이 머리를 맞댄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기대가 더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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