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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y 23. 2018

<버닝>의 희미한 웅변들

영화 <버닝> / 이창동 감독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버닝>의 칸 입성에 연일 떠들썩한 분위기다. 유아인을 향한 여러 논란들이 미처 점화되지 않아 더 떠들썩한 것도 있다. 물론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의 신작이라 반가운 것도 있다. 아쉽게도 황금종려상의 영예는 <버닝>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칸과 끈덕진 관계가 있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돌아갔다. 기대에 반한 결과지만, 유감스러운 분위기는 아닌 듯 보인다. <버닝>을 향한 외신의 찬사는 그야말로 뜨거웠고, 요 근래 한국영화에 대한 반응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버닝>을 보고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 관점으로 극명히 갈릴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이에 더해 두 관점이 결코 뒤섞이지 않을 것이란 느낌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버닝>의 장르가 미스테리란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감독이 누누이 언급했던 한국과 요즘 세대의 이야기란 점이다. 전자는 훌륭하다. 문제는 후자다. 영화 속에서 후자는 분명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지만, 극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퇴색되는 조짐을 보인다. 나아가 중간중간 삽입된 극적인 연출들이 후자의 감상을 방해한다. 세태를 향한 날카로운 지적과 해묵은 병폐들을 단번에 쏟아낼 수 있음에도 정작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건드리려는 시늉으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 상당수의 장면을 할애한 고물 트럭과 포르쉐의 접전이 그 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밀양> 등 한국적인 무언가에 강한 집착을 보여온 이창동의 옛 모습이 좀처럼 <버닝>에선 보이지 않는다.


<버닝>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다. 원작은 열린 결말의 미스테리 물이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과 <헛간을 태우다>를 비교하며 선을 그었다. 원작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그 말은 즉, 원작의 미스테리를 답습하되 이창동의 장기인 한국적인 무언가를 화면 안에 가득 채우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결과물은 조금 달랐다. 감독의 의도에 편승해 <버닝>을 바라볼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 포인트를 명확히 인지하고나서야 그 의미가 유효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버닝>의 결말과 끝끝내 풀리지 않는 의혹들에만 주박 된다면, 이 영화가 비추는 진의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버닝>은 잔상이 짙다.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유아인)는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청년이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몰라보게 이뻐져서 돌아온 해미를 보고 종수는 그녀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해미는 종수가 어릴 적 자신에게 했던 심한 말(못생겼다는)을 들먹이며,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종수에게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라 말하며 자연스레 그에게 다가간다.


당장 눈 앞에 이뻐져서 돌아온 해미에게 매료된 종수는 그녀의 기억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하나하나 흘려보내듯이 듣는다. 그러나 한참 뒤, 그녀 곁에 낯선 남자 벤이 나타나고, 이윽고 그녀의 자취가 사라지자 종수는 그녀가 남겼던 말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종수에게 남은 건 얼마 없는 그녀와의 기억뿐이다. 종수는 그녀가 했던 말들에 혼란을 느낀다.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우리 집엔 고양이가 살고 있어”,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 등 그녀가 남긴 수수께끼에 갇힌다. 여기에 어딘가 미심쩍어 보이는 벤과 이전에 그가 이야기했던 그의 기묘한 취미가 맞물리며, 벤이 해미를 어떻게 했을 것이란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우연히 벤의 집에서 해미의 시계를 발견하고는 의심은 확신으로 번진다.

고물 트럭과 포르쉐의 난데없는 접전은 이 의심이 피어나고 해소되기까지 계속해서 반복된다. 여기에 동이 틀 무렵마다 벤의 지독한 취미 현장을 찾기 위해 파주 벌판을 쏘다니는 종수의 맹목적인 모습이 겹친다. 이로 인해 해미를 둘러싼 종수와 벤의 미묘한 온도차 그리고 그 사이에서 큰 박탈감을 느꼈을 터인 종수의 감정이 상당 부분 사그라든다. 오로지 진실이라는 미명으로만 시선이 몰린다.


개츠비를 운운하며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벤을 향한 종수의 못마땅한 감정 역시 어느새 해미를 어떻게 했을 것이란 합리적인 의심으로 가려져 있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시기하고 저주하는 맥락의 이야기는 흔하지만 종수가 벤을 쫓는 건 그러한 상대적 박탈감과 앙심 때문이 아니다. 해미를 뺏긴 데다 돌연히 해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벤이 너무나도 미심쩍다는 이유에서다. 종수와 벤 각자의 계급에서 빚어질 수 있는 마찰인 수저 갈등이나 사회 구조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버닝>에서 말하려는 한국적인 요소를 웅변할 갈등이 첨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미스테리는 넘쳐나는 데에 반해.

물론 작중 틈틈이 언급되는 종수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종수와 그의 아버지가 처한 환경 그리고 이들 부자가 답습하고 답습하게 될 불우함은 이미 그 자체로 한국의 뿌리다. 가난의 되물림과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계층 간의 간극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터무니없이 적다. 아버지의 배역으로 MBC 최승호 사장을 고른 탓이라 그런지 대사도 없다. 변호사 역으로 나온 배우 문성근이 잠시나마 한국의 전형적인 꼰대상을 연기하며 한국의 현주소를 환기해준다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버닝>은 영화적인 것들로 가득하다는 칸의 상당수의 반응은 어쩌면 이 같은 아쉬움을 대변하는 말처럼 들린다. 실체가 없고, 진실이 가려지고, 거짓마저 환상 같은 <버닝>의 의지는 좀처럼 헤아리기 어렵다. 이 영화를 한국이라는 시선과 청년세대의 시선으로 보면 더 그렇다. 어쩌면 <버닝>은 하루키 문학 그 자체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버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나 울컥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동세대 청년의 입장으로서 말이다. 소설가 지망생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평소 글로 자신을 증명해온 배우다. 연기를 하는 시간 외에는 모조리 글 쓰는 데 할애했다는 그는 이전에 잡지 <DAZED>의 기고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계획된 예산을 크게 초과한 임차료에도 불구하고 1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전적으로 안방에서의 전망 때문이었다. 남산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책상을 두면 글이 막힘 없이 잘 써질 것만 같아서다”. 해미가 사라진 방에서 종수는 글을 쓴다. 창 밖에는 남산이 걸려있다. 상실의 아픔을 느끼고도 지독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써 내려가야만 하는 청년의 의지를 대변한 인물이 유아인이란 점이 고맙다. “배우는 아무나 하니?”라며 씁쓸히 웃던 해미(전종서)의 대사 또한 그들이 거쳐온 시간을 실감하게 해준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버닝>이 외치고자 한 울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벤을 찌른 종수가 진짜 종수였을까? 란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걸 종수의 허상이라 믿고 싶다. 고집불통 아버지와 달리 종수는 현실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는 인물이다. 종수는 현실 속에 산다. 종수란 존재가 환기하는 대상은 우리다. 우리 역시 현실 속에 산다. 현실의 우리는 온종일 수만 가지의 추악들과 상상의 씨름판을 벌린다. 그곳에선 죽고 죽이며 찢어 발기는 일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우리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사는 진짜베기 현실감각이라 믿는다. 만약 <버닝>의 결말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면, 나는 <버닝>의 마무리가 매우 마음에 든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미스테리를 축으로 돌아간다. 해석은 개인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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