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토닥토닥.
나를 마지막으로 돌본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면서도 항상 몸 따로 마음 따로 노는 것 같다. 친구를 만나 소회를 푼다거나, 주말에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거나, 아이가 잠든 후 조용한 집안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책을 읽고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이런 게 나를 돌본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의문이 든다.
하루를 쥐어짜서 만들어낸 잠깐의 쉼이 진정으로 나를 돌보는 것 일까.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의 휴대폰을 급속 충전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
나는 항상 레이더를 켜고 살아가는 엄마이다. 물론 모든 부모님들이 아이에 대해 사방팔방 레이더를 켜 놓고 육아를 하겠지만, 원래도 걱정을 미리 사서 하는 편이라 조금이라도 아이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거나 내 기준에 위험할 것 같은 마음이 들면 나의 레이더는 빨간 불이 켜지며 위잉위잉 돌아간다.
아이가 처음으로 바닥에 머리를 찧었던 날, 간식을 먹다가 헛구역질을 했던 날, 갑자기 분수토를 하며 먹은 것을 다 게워냈던 날, 밖에서 혼자 뛰어가다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졌던 날 등 내 레이더를 벗어나 모든 위험했던 날들이 하루에도 몇 번은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에서 더욱 아이를 예의주시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 곁을 떠날 수 없다. 어린이집에서도 갑자기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오면 받기 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대부분이 헤프닝에 끝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항상 선생님의 전화를 끊고 나면 안도의 한 숨을 작게 내쉰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아이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엄마만 온 몸에 들어간 힘을 좀 빼주면 좋으련만. 마음대로 쉽게 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는 제대로 나를 돌본 적이 없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에 내 삶에서 나를 지워내고 아이를 돌보는 것에 헌신했다.
그런데 최근 아이를 재우고 나서 식탁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한 페이지 남짓한 글을 쓰는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 바탕에 한 글자 한 글자 키보드를 토독토독거리며 뭔가를 채워가는 이 시간이 요즘 매우 소중해졌다.
단순히 육아에 대해 글을 쓴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엔 나와마주앉아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기를 쓸 때는 신변잡기적인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가 많은데, 고요한 집에서 오로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이 손을 타고 흘러 노트북으로 옮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이 순간이 나는 ‘아, 지금이 내가 나를 돌보고 있구나.’ 생각이 든다.
내가 그 당시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무엇을 갈망했는지, 심지어 나조차도 모를 순간에 스쳐 지나갔던 기분들이 마치 스노우볼처럼, 처음에는 매우 조그마했지만 점점 커다란 눈덩이로 불어나듯 나 스스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해 건강하고 뚜렷한, 단단해진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이에게 켜 놓은 레이더를 잠깐 꺼놓을 수있는 순간이라 그런 것 같다. 아이는 곤히 잠들어있고, 가끔은 코고는 소리도 평화롭게 들린다. 그리고 나는 오롯이 내 생각을 옮겨 쓰는 이 시간에 집중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자신과 대화하며, 내 마음을 보듬어 주고, 내가 나를 안아주고, 잘 하고 있다고 나에게 스스로 말해주는 매일의 이 시간들이 나를 돌보는 순간들이 되었다.
이전에도 내 스스로가 다짐했듯이, 나는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쓰는’엄마가 되고자 한다. 누가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쓰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또 나를 돌보는 소중한시간에 대해 소홀해 질 것 같다. 대나무 숲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누군가 들어주지 않아도 내가 꾸준히 나만의 ‘나를 돌봄’을 계속 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메아리처럼 나에게 돌아와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나를 일으켜 줄 것이다.
처음엔 아이에게 엄마가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 마음을 글로 썼다고 나중에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내가 나를 이렇게 돌아보고, 돌보고 있었구나’ 나중에 나에게 가끔씩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