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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 Jan 22. 2024

나의 교집합(2)

부끄러운 어른

"혹시 책 팔렸나요?"


몇 달 전, 벼르고 있던 책장 정리를 했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은 당근마켓에 중고로 올렸다. 알짜배기는 빨리 팔렸고 마지막으로 소설 책 몇 권이 남은 상태였다. 상대는 그 중 어느 청소년 문학 소설 2권을 구입하고자 했다. 그 책은 나도 꽤 유익하게 읽은 터라 마지막까지 중고판매를 고민했었던 책이었다.


“제가 현재 월,수,금은 약 2시35분 정도나 약 4시 35분, 그리고 7시 이후에 가능합니다.”


“제가 7시까지는 수업이 있어서, 혹시 전화를 못 받으면 그냥 가지마시고 5분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수업 끝나면 곧바로 나가겠습니다.”


“OOO마트 주차장에서 만나도 될까요? OOO에 있는 OO점입니다. 1층 정문 쪽에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상대는 정중한 말투로 자신의 조건에 내가 맞추길 바랐고, 나는 처음엔 상냥한 판매자의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갔지만 나중에는 판매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결국 어찌어찌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마지막까지 상대방은 7시가 지나도 절대로 가지 말고 기다려달라는 당부 아닌 당부를 남겼다.


약속 당일, 이왕 여기까지 나온 마당에 얼른 책이나 팔아버리고 오자는 생각으로 장소에 미리 도착한 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학원 선생님이겠지? 말투를 보니 남자인 것 같았고.. 되게 깐깐한 사람이겠군. 얼마나 바쁜 사람이면 이렇게 시간을 맞추기 힘이 들까.


이런 저런 생각에 7시에서 몇 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서 있던 마트 입구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부랴부랴 달려오던 사람은 다름아닌 초등학생 남자아이였다.


본인의 상체보다 훨씬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지고,(멘다는 것보다 진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옅은 솜털같은 눈썹을 다 가릴 정도의 곤색 뿔테 안경을 낀, 그래봤자 초등학교 4-5학년 정도 되었을 법한 아이가 바로 내 책의 구입자였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내 눈치를 보며 "혹시 당근마켓..."이라고 쭈뼛대던 영락없는 어린아이.


나는 당황함을 애써 감추고 "아, 여기 책."이라며 나도모르게 반말로 대답하고는 급하게 책을 건넸고, 그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만원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고마워. 잘 읽어~" 어색한 인사로 헤어진 후 그 날 밤, 책을 팔아 번 돈으로 편의점에서 4캔 만원하는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는데,

"당근!"하고 알람이 울렸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좋은 책 싸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


아! 순간 나는 얼굴이 그야말로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졌다. 부끄러웠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운 어른이 되었다.


이런 시국에도 가방 속 가득 들어있는 어제의 복습과 오늘의 숙제와 내일의 예습으로 지구에서 제일 바쁜 12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편견으로 둘러싸인 이 어른은 어리다는 이유로 너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네가 건넨 두 번 접은 만원으로 고작 이 어른은 맥주로 바꿔버렸다는 것이.

전부 부끄럽고 미안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라고 짧은 답장을 보내고,

그날은 빨개진 얼굴을 식히느라 늦게 늦게 잠들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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