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전생 같은 전성기

엄마의 전성기는 언제였냐구?

by 안스

엄마의 전성기는 언제였냐구?


음,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매일같이 입던 교복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어. 이제 내 맘대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레었지.


캐리어안에 책 대신 옷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제주로 내려온 나는 아침 수업에 가기 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옷장 앞이었어. 지금생각하면 뭐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은데 그때는 그게 재밌었거든. 서툰 솜씨로 화장을 하고, 몸에 딱 맞는 청바지와 화사한 색깔의 블라우스를 입고 두꺼운 전공책을 품에 안고서 또각또각 교정을 걸어 다녔지.


2009년엔 말이야. 걸그룹 소녀시대의 ‘Gee’라는 노래가 대박을 쳤어. 그리고 일명 ‘스키니진’이 대유행을 했지. 스무 살의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어. 내 또래들은 하나같이 스키니진을 입고 다녔거든. 지하상가 옷가게들은 무지개색깔별로 스키니진을 팔았고, 외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나의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도 그것들을 한 두 개 정도는 살 수 있었어.


그때는 별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그 얇고 작은 청바지가 쏙 들어갔었단 말이야. 진짜야.

15년 전 엄마의 몸무게는 50kg이었거든.


패션의 완성은 바로 ‘몸매’라는 걸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나는 외모지상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야.

신경 써서 꾸미지 않아도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생기 넘치고 이쁘기만 했던 날이 바로 스무 살, 청춘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은 거지.


젊은 날을 되돌릴 수도 없고, 그때의 내 몸뚱이를 그대로 다시 가져오기에는 이제 15년보다 더 걸릴 것 같아.


갑자기 엄마의 전성기가 떠올랐던 건, 오늘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고 있는데 헬스장 창 밖 멀리서 청바지에 카디건을 걸치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어느 젊은 친구를 발견하고 엄마는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야.


얼마나 좋을까.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빛이 나는 20대라니.


나도 그 시절을 열심히 놀았고, 제대로 공부했고, 알차게 보내서 후회나 미련은 없어.


그냥 그때가 가끔 너무 그리워질 때가 있을 뿐이야.


지하상가 좌판에서 파는 8천 원짜리 티셔츠를 걸쳐도 명품옷 부럽지 않던 나의 스무 살을 말이야.


그로부터 15년이 지나고 나니, 나의 전성기는 마치 전생처럼 느껴지더라.

밤새 놀아도 지치지 않고 곧바로 1교시 수업을 들어갔었던 체력과, 아무거나 입어도 눈에 띄었던 잘록한 허리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당당하게 걸었던 나의 당근 같은 종아리가 있었지.


지금은 너와 2시간을 놀고 나면 9시가 되면 곯아떨어지고, 두 명의 아이를 출산하면서 처질대로 처진 뱃살과, 이제는 가을무 같아진 내 다리를 가리기 위해 입는 임부복과 너와 네 동생을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안느라 굽어질 대로 굽어진 내 어깨와 거북목이 존재할 뿐이지.


가끔 클라우드에 너희들의 사진을 저장하려고 들어가면 20대의 나를 발견할 수 있어.

아니 이게 나라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집중해서 본 나의 과거는 진짜 이뻤어.

그냥 내가 본 내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어.



근데, 그거 아니? 엄마의 스무 살은 저 멀리 지나갔고, 그때의 몸무게 근처로라도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너와 네 동생을 보면서 이제 두 번째 나의 전성기를 맞이했구나 생각해.


첫 번째 전성기는 스무 살이었고, 두 번째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야.


너와 네 동생을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으면서 맛있는 음식 맘껏 먹고, 푹 쉬고, 잘 자고. 그랬으니까 너희들이 건강하게 태어난 거겠지.


그리고 너희들을 열심히 키우는데 집중하기 위해, 따로 운동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고 오로지 육아와 살림에만 전념한 거야.


엄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바로 너희들과 네 아빠와 함께하는 지금부터야.

지난 전성기는 마치 전생 같지만, 지금 현생은 열심히 보내서 일명 ‘갓생’ 살 거야.


오늘도 양팔에 너와 네 동생을 번갈아 안으며 데드리프트하듯이 목욕을 마치고, 너는 갈비에 밥을 먹이고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단백질셰이크를 급하게 마셨어.


나의 두 번째 전성기에 다름 아닌 우리 가족이 함께여서 엄마는 너무 행복해.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앞으로 우리 인생에 다가올 수많은 기회를 제대로 잡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더라. 지금은 살이 많이 쪄서 줄넘기를 조금만 해도 무릎이 아프고 발뒤꿈치가 저릿저릿해. 앞으로 내 인생에 우리 가족과 함께 맞이할 기회를 확실히 잡으려면 이렇게 살아서는 기회의 그림자도 못 밟을 것 같아.

그때의 몸무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50kg의 와이파이라도 잡히는 근처에라도 갈 수 있도록 엄마 노력할게.

건강해지고, 날씬해질게. 너희들과 더 열심히 놀기 위해서.




이상, 오늘 러닝머신에서 열심히 달려서 심박수 180을 찍으며 한 생각이야.


엄마, 살 좀 빼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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