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같은 호수, 풍경의 일부가 되는 법
보덴제 주변에는 호수를 둘러싼 기찻길이 있다. 어떤 역은 호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찻길이 있어 보덴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역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파아란 호숫가가 해변가처럼 펼쳐져 사람들을 반기는 곳도 있다. 라돌프젤 기차역이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곳이다.
라돌프역에서 내리면 바로 호수와 백조와 오리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린다우 섬이나 콘스탄츠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은 비교적 한적하게 호숫가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따가운 오리들의 눈총을 무시하고 피자를 먹거나 한가롭게 호숫가 주위를 걷는다.
빼곡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호숫가를 따라 노천카페와 작은 레스토랑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도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벤치들이 가로수 숫자만큼이나 넉넉히 자리하고 있다.
초여름부터 마을은 휴양지와 축제의 시작인 듯 주말마다 작고 큰 페스티벌이 가득하다. 호숫가 옆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는 재즈와 락밴드와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회들이 펼쳐진다.
호숫가에는 우리나라의 해변가처럼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한 여름에는 수영하는 사람들과 새들이 그늘 아래에 앉아 더위를 식힐 수 있다. 또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큰 사우나도 있어 겨울이면 사우나를 하고 바로 호수에 뛰어들어가는 호숫가 근처 사우나만의 경험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비가 온 직후가 아닌 이상 호수의 물은 어찌나 맑은지 호수 위에서 평화롭게 헤엄치는 새들의 발이 물아래에서는 얼마나 분주히 움직이는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보덴제의 이름이 바닥이 보일 정도로 수심이 얕아서라고 하는데, 라돌프젤 기차역 앞의 호숫가가 그 이름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렇게 얕은 수심 덕분에 이곳에는 여름이면 특히 어린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낮의 빛이 호수물을 투명하게 비친다면 해질녘 호숫가는 그날의 습도와 햇살에 따라 자연의 모든 파스텔 색감을 흩뿌린다. 호수와 하늘의 색이 닮아가는 시간.
거위인가 하고 봤다가 물속에 잠긴 작은 동상에 깜짝 놀랐는데, 찾아보니 라돌프젤 호수 앞에 놓인 어린이 동상이었다. 호숫가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인데, 이 소년이 얼마나 보이는지에 따라 호수의 수량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강우량이 풍성한 시기엔 머리만 보이기도 하고 가뭄이 드는 날에는 쪼그려 앉아 손바닥 위에 물을 담아보려 하는 소년의 온몸이 보이기도 하니 놀라지 말길.
그러다 문득 사방이 한순간 온통 붉게 물드는 순간이 온다. 하루 내내 요트와 페리가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파도들도 해가 저물면서 모두 사라지는 그 고요한 순간의 호수. 그러면 또 한 번 호수와 하늘의 색이 붉은색으로 함께 물드는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보통 라돌프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호숫가 풍경에 시선이 뺏겨버린다. 하지만 정신을 다시 차리고 호수 뒤쪽을 돌아보면 그제서야 기다란 첨탑을 뻗은 성당이 있는 구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구도심의 작은 골목들을 따라 아기자기 이어진 타운을 보면 마치 미녀와 야수의 첫 장면, “Little town, it’s so quite village (작은 마을, 참 조용한 동네). Every day like the one before (매일이 그 전날과 비슷한 날)“이라고 벨이 노래를 하며 마을 아침 시장을 들어서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의 역사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무려 9세기, 826년 라돌프 주교가 세운 수도원을 중심으로 지금의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인구는 싱엔(또는 징겐)보다 2배 정도 적지만 중세시대의 라돌프젤은 짧게나마 자유제국도시일 정도로 보덴제 북부의 핵심 도시였다.
구도심을 걷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보덴제 근처의 마을마다 가지고 있다는 요괴들의 모습을 한 분수를 만날 수 있다. 피에로, 또는 광대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있는 익살스러운 모습의 삐쩍 마른 라돌프젤의 요괴. 싱엔과 라돌프젤, 두 마을의 요괴까지 찾았다.
이렇게 구도심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뭔가 무척 작다는 느낌이 확고해지는데, 이때 그냥 특별한 것이 없네 하고 돌아서면 오산이다. 특히 꽃과 식물이 한창인 계절에는 말이다. 구도심을 둘러싼 성벽을 아주 잠깐 돌아보면 성벽을 따라 펼쳐진 작은 도시 정원을 발견할 수 있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내가 찾아간 6월은 양귀비와 장미꽃의 계절이었다. 아주 화려하거나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구도심의 매력처럼 작아도 한껏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공원이니 꽃의 계절엔 꼭 둘러봐야 하는 곳이다.
이렇게 기차역 앞 호숫가와 아기자기한 멋의 구도심까지 돌아봤으면 이제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면 될까 싶겠지만, 라돌프젤에는 숨겨진 기다란 호수공원이 남아있다. 도시정원의 끝자락에서 다시 호숫가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그 옛날 귀족들의 저택들이 길을 잇는다. 도시공원에서 만큼이나 풍성한 자신들만의 정원을 한껏 뽐내는 저택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다시 파란빛의 호수와 마주친다. 길 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숫가로 들어가거나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만 잘 따라가도 보덴제를 찾을 수 있다.
그 길 끝에 기차역 앞의 호숫가와 가로수보다 더 짙고 길게 펼쳐진 호수 공원이 펼쳐진다. 초록이 짙은 나무 그늘 사이로 파랑이 짙은 호숫물이 반짝여 순간 이래서 보덴제가 독일 사람들에겐 휴양지라고 불리는지 깨닫게 되는 풍경이다.
풍경으로만 보면 이곳이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닷가 휴양지에서도 볼 수 있는 모든 색감과 사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보덴제가 아니라 지중해가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짙은 수색에 놀라 물가로 가까이 다가가보면, 그제야 다시 이곳이 호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수심이 나타난다.
저마다 각자 튜브와 스탠딩보드와 카누를 들고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사람들. 평화로운 듯 머리만 내놓은 채 끊임없이 물속을 휘저으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옆을 지나가는 백조나 오리와 그 다지 다를 바 없는 지구의 생명체 같다.
보덴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은 보통 호수 건너 도시와 도시를 잇는 페리가 다니는 항구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항구가 있는 경우에는 보통 그 항구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에 따로 사람들의 수영지가 따로 있기도 한데, 라돌프젤의 경우엔 거의 대부분의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수영을 할 수 있다.
호수 경계를 따라 하나의 공원이 끊겼다가 다시 바로 다음 공원이 계속 이어지는 산책길과 물놀이공간. 어떤 구간은 돈을 내야 입장할 수 있는 물놀이 공간이 있다면, 그 울타리 바로 옆에는 돈을 내지 않고도 바로 호수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유료 혹은 무료로 보덴제에서의 물놀이를 즐긴다.
그렇게 호수를 쭉 따라가다 보면 몇몇 건물들의 웰니스 타운이 나타난다. 이쯤에서 끝이 나는 건가 싶을 때쯤 지도를 보면 그 타운 끝에 초록의 숲 사이로 사람들이 걷는 작은 길이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숲 속의 오솔길로 계속 들어가 본다.
그러면 길 어느 즈음에 우뚝 솟은 나무로 된 전망대를 발견할 수 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꺾이는 부분이 여러 번 굽어져 있을 정도로 제법 높은 전망대이다. 한 명이 들어서면 이미 꽉 찰 정도로 좁은 계단이기 때문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려줘야 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부는 대로 흔들려줘야 더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바람이 불면 정말 흔들리는 것이 느껴져서 꽉 잡고 올라서야 한다.
그렇게 아주 잠깐, 약간 올라왔다고 생각한 전망대 위에는 이렇게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망대 앞으로 어떤 인위적인 건물 하나도 가로막지 않고 있어 보덴제 그대로의 풍경과 형태를 고스란히 관람할 수 있는 숨은 명당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곳이 왜 이런 모양으로 지도에 그려져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풍경. 그 옛날 처음 다른 대륙을 이동하며 지도를 그리던 사람들은 해안가를 따라 배를 타며 그 모양을 지도 위에 그렸다고 하는데, 전망대 위에 서보니 라돌프젤 주변의 보덴제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덴제의 깊이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선명한 색감의 비교. 마치 바다처럼 더 깊은 곳은 더 짙은 파랑, 얕을수록 더 옅어지는 그라데이션의 밝기가 이래서 보덴제라는 이름이 왜 붙어졌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필리핀 보홀이나 팔라완에서 봤던 것 같은 에메랄드빛 색감 때문에 왜 이곳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인지, 왠지 잘하면 산호초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들던 여름날의 호수 색감이었다.
이렇게 지도의 길이 끊어진 곳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 라돌프젤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는 아직 잘 알려진 곳은 아니고, 또 둘러봤다고 해도 보통은 기차역 앞의 호숫가나 바로 뒤의 올드타운을 돌아보는 정도가 대부분인 듯하다. 하지만 라돌프젤에는 알려지지 않은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기나긴 공원이 펼쳐져 있다.
인류학을 공부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말들 중에 하나가 있다면 문화란 박물관에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라돌프젤은 그런 곳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덴제를 책으로만 읽고, 산책으로만 걸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곳이었다면, 라돌프젤에서는 내가 직접 보덴제 품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곳이 되었다.
마침 물속에 들어가 옆에서 떠다니는 오리처럼 나 역시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계절에 보덴제를, 라돌프젤을 지나간다면, 이곳에서 한 번 이곳 사람들처럼 하루 정도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보덴제의 풍경의 일부가 되어보길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