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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21. 2023

동남아시아의 박물관에서 낯선 작품들과 만났을 때

필리핀 국립 박물관 큐레이터가 필요하시나요?




필리핀 고고학과 수업 과제


대학과 대학원 학번의 앞자리 수 하나가 바뀌는 시간만큼 내가 제법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과제'였다. 인류학과의 과제들은 이곳이 필리핀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인류학과의 과제라는 것들이 이런 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는 뇌를 제대로 붙잡지 않으면 소풍을 간 것인지 과제를 하러 간 것인지 헷갈리기 쉬운 과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생물인류학 수업의 경우, 과제의 하나가 바로 동물원에 가서 유인원 하나를 골라 일과를 하루 종일 관찰하고 리포트를 내는 것이었고, 고고학의 경우 인류학 박물관을 다녀와 소감문을 내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으면 초등학교 숙제 아닌가 싶은 과제이기도 한데, 문제는 엄연히 이 과제는 인류학과 그것도 대학원 수준의 과제였다는 것이다.


필리핀 국립박물관을 가야 하는 과제를 받고 나니 문득 내가 필리핀에 처음 왔을 때, 같은 박물관을 한 번 다녀간 적이 있는 듯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내 기억에는 없었다는 것이 함정. 뭔가 박물관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이미지, 박물관 특유의 정갈한 냄새 같은 기억은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정작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는 기억이 나는 것이 없어서, 이 기억이 내가 박물관을 정말 다녀와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곳의 사진을 찍어서 다녀왔다고 착각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나는 필리핀에서 특별히 박물관을 자주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꽉 막힌 마닐라 도로를 뚫고 갈 만큼 특정 박물관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렵게 박물관에 들어갔다고 해도 필리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는데, 내 경우엔 왠지 아는 것이 없으니 보이지도 않아 사랑하지 않게 된 케이스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생각해 보면 그랬다. 어느 나라에 가서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는 이유는 특별히 내가 어떤 유물 혹은 역사, 그 나라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해외에 나가서도 무언가의 명성 혹은 누군가의 이름 때문에 궁금해서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런 유명한 곳들이라면 워낙 남들이 멋있다고 하니 그나마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은 있어서 진짜 그런가 보다 생각하게 되고, 그 포인트를 이해하고 싶어 더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아는 것이 조금 더 생기면 보이는 것도 그만큼 늘어나 뭔가 뿌듯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느새 사랑의 감정이 심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필리핀 박물관은 사랑에 빠지기 무척 힘든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박물관들은 미술이나 역사, 자연사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서양의 정반대 쪽에서 그들만의 학풍과 화풍을 건설해 낸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이집트나 인도처럼 마치 신화의 시대부터 자신들의 조상, 그리고 지금까지 영원불멸하게 전해 내려 온 듯한 유물 유적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유명하지 않아도 무언가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연습을 해본 적이 있었다는 것. 그건 바로 내가 나고 자란 고향도시의 작지만 거대한 박물관들 때문이었다.


어른이 돼서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를 다시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뱉어내는 말이 있다. "내 기억 속에선 엄청나게 큰 학교처럼 보였는데 이렇게 작은 건물이었다고?" 다행인 건 그 충격이 가시고 나도 남아있는 추억의 크기는 여전히 제법 크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왜 서울이 아닌 작은 지방의 소도시들에도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박물관들이 필요하냐고 물어본다면, 나에겐 적어도 이런 지역의 작은 박물관 미술관들을 통해 단순히 이름과 명성 때문에 작품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스토리와 형태에 끌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연습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다.


서울에 살지 않는 지방의 학생들에겐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지역의 단골 소풍 장소들이 있을 텐데, 나에겐 그중 하나가 바로 목포의 박물관 단지였다. 조선시대 지역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던 남농기념관, 내 기억 속에 실물 크기의 공룡뼈를 처음 본 것으로 기억나는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14세기 동아시아의 해양무역을 잘 간직하고 있는 해양유물 전시관까지 이 세 곳은 목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초중고 시절 한 두 번은 꼭 가게 되는 소풍명소다.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해양유물 전시관이었는데, 나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박물관의 변천사가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너무 익숙한 곳이다 보니 고등학교 때 부턴가는 굳이 소풍을 가지 않더라도 괜히 혼자 바다도 볼 겸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해양박물관 안까지 천천히 훑어보고 오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했었다. 그때의 그 기억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해양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생겼고, 이후 세계 어디를 가든 크기를 막론하고 바닷가 근처의 해양박물관이라면 어디든 들어가 보는 취미도 생겼다.



가잔 최근 오픈한 자연사 박물관 (aboutphilippines.org)

필리핀 국립 미술관, 인류학, 자연사 박물관


그렇게 따지면 필리핀 역시 해양을 통해 다른 세상과 일찍이 교류했고, 바다에 둘러싸여 바다와 함께 사는 군도 국가였다. 고고학 과제도 할 겸, 필리핀의 해양 유물 및 박물학을 관찰하기 위해 그렇게 나는 필리핀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필리핀 마닐라에는 대표 관광지인 리잘 파크를 중심으로 필리핀을 대표하는 박물관 단지가 있다. 필리핀 국립박물관이라고 불리지만 갤러리에 가까운 국립박물관, 그 바로 옆의 인류학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참고로 대학원 시절에는 신축 공사 중이어서 가보지 못했지만 2017년부터 새로 문을 연 자연사박물관의 경우, 거대한 건축물과 방대한 필리핀 자연생태를 잘 정리해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하니 자연사 박물관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해 본다).


세 박물관이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하루에 모두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국립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의 경우 하루 반나절 모두 돌아보기에 규모가 무척 크며 그나마 인류학 박물관은 규모가 작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경우, 그림과 조각 등 예술을 좋아한다면 국립박물관, 필리핀의 다양한 소수민족과 자연에 관심이 있다면 인류학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을 추천한다.


인류학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은 필리핀 국립대학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미국 식민지 시절 처음 박물관을 설립했을 때 초기 박물관의 유적들을 발굴하고 정리한 사람이 바로 필리핀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였던 베이어 박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리핀 박물관을 가면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인류학과, 고고학과, 그리고 박물관학과 관련된 자료나 인물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학교의 인류학과를 다닌다고 해도 나는 외국인이고 필리핀은 워낙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방대한 섬과 자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자 가기에는 지난번처럼 갔다 온 느낌만 들고 올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과제를 핑계로 고고학 수업을 듣는 같은 과의 친구들과 함께 박물관을 탐방하기로 했다.



출처: 필리핀 국립 박물관


그렇게 필리핀 친구들과 필리핀 국립박물관이라는 건물 앞에 섰을 때, 나는 이 건물이 필리핀보다는 오히려 스페인이나 미국에 두는 것이 덜 낯설어 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나라마다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장소는 정말 손에 꼽히는 몇 안 되는 곳일 텐데, 그 유일한 건물의 첫인상에서 필리핀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필리핀 국립박물관의 건물은 미국의 통치시절 필리핀 건축가가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지은 건축물이었는데, 국립박물관으로 쓰이기 이전에는 필리핀 국회의 상원의회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 (위키피디아)


태국이나 베트남, 말레이시아의 국립박물관 건축물을 보면 확실히 이곳이 유럽도 동아시아도 아닌 다른 문화권의 나라라는 첫인상을 준다. 반면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의 국립박물관도 겉모습을 보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지어진 국립박물관 때문인지 그 나라만의 색깔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국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우리나라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해 본다면 경복궁 앞에 지어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다만 너무나 확연히 다른 것은 일본의 우리나라 통치 시간이 약 30년 정도로 한 세대의 삶의 일부를 차지했던 정도라면, 스페인과 미국의 필리핀 통치 시절은 그의 10배가 되는 약 300년으로 한 세대의 삶을 훌쩍 넘어 몇 세대의 삶을 모두 덮고도 남을 긴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양식의 건축물을 지웠다고 해도 그전에 또 스페인이 더 오랜 시간 필리핀을 지배했으니, 같은 식민지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우리나라와는 무척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 약 400여 년 전에 존재했을 고유한 필리핀의 건축 양식으로 국립박물관을 다시 짓는다면 그 건축물은 어떤 모습일까? 필리핀 인류학자들의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필리핀 국립 박물관 로고 (위키피디아)


대신 필리핀 국립박물관, 인류학 박물관,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까지 박물관을 상징하는 로고는 다행히도 필리핀의 옛 모습을 담고 있다. 필리핀도 스페인의 알파벳이 들어오기 전까지 자기만의 알파벳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마 필리핀 사람 중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옛날 필리핀 알파벳을 바이바이인 (Baybayin) 또는 알리바타(Alibata)라고 하는데, 필리핀 국립박물관 로고에 그려진 알파벳은 문화유산을 뜻하는 "Pamana"라고 하는 단어의 앞글자 Pa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필리핀 국립박물관의 첫 작품, 왜 이런 그림이?


그렇게 국립박물관의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붕까지 닿는 크기의 거대한 그림이 방문객을 덮친다. 말 그대로 덮친다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림인 후안루나의 스포리아리움(Spoliarium)의 경우, 그 크기가 세로 4미터, 가로 7미터에 달하는 필리핀에서 가장 거대한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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