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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Dec 07. 2024

2. 윤석렬과 마르코스, 김건희와 이멜다

지금 이 시점에 꼭 살펴봐야 하는 인물들



이 중대한 시점에 필리핀이 왜?


필리핀에 살 때, 필리핀에 오시던 어르신들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60년대만 해도 그때는 필리핀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어. 한국전쟁 때도 도와줬고 장충동 체육관도 필리핀이 지어주고 …“



필리핀은 우리보다 잘살았었다.


실제로 한때 필리핀은 경제대국 19위까지 오른 적이 있는, 잘 나가던 시절이 있던 나라였다.


먼저 필리핀을 이해하려면 그 식민역사가 필수적이다. 필리핀은 동쪽의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서양세력의 식민지배를 가장 먼저 받은 나라이다. 15세기가 열리면서 처음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 인도 방향이 아닌 그 반대쪽,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세계일주를 시도한 대항해시대의 선구자인 마젤란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세계 일주가 끝나버린 곳이 바로 필리핀이었다.


그의 항해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고, 그래서 후에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사람들이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국가 이름을 필리핀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7천 여개의 섬과 그만큼 많은 부족들이 가졌을 다양성들이 스페인 식민지배와 가톨릭의 통제로 파괴되었고, 그들 고유의 문화와 문명이 보유되지 않은채로 필리핀에는 스페인에 의해 동쪽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유럽식의 대학, 의료기관 등이 세워졌다.


약 300년이 지난후, 필리핀은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 바깥에서 획득한 가장 첫번째 식민지가 된다. 이때 필리핀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공화국을 세웠고, 최초의 민주 선거제도를 도입했으며,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그 수많은 섬들이 하나의 독립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필리핀은 1908년 최초의 ‘국립‘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필리핀은 영어가 국가공용어로써 사용된 최초의 아시아 국립대학교의 타이틀도 갖게 되었다.



독재자 마르코스를 쫓아낸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학생이 마르코스였다고?


필리핀 내에서는 우리나라의 국립 서울대학교만큼 최고의 대학이라는 입지를 가진 필리핀 국립대학교는 그만큼 걸출한 필리핀 인사들을 배출해 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마르코스(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이다. 현재 필리핀 대통령인 봉봉 마르코스의 아버지이며, 같은 시절 18년의 박정희 독재기간보다 더 긴 21년의 독재정치를 이어간 필리핀의 독재자이기도 하다.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초반에 나는 그 마르코스가 필리핀 국립대학 학생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그 21년의 마르코스의 독재정치가 물러나도록 가장 앞에서 싸웠던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바로 필리핀 국립대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리 그 능력이 출중해도 안보나 외교자리의 공무원을 뽑을 때 필리핀 국립대학교 학생들을 암암리에 차별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때의 필리핀 국립대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독재자 마르코스에 처절하게 투쟁했으며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1987 항쟁에 영향을 준 필리핀의 시민 혁명




독재자 마르코스의 대학 전공은?


그렇게 매일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수많은 교수님들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구도 나에게 마르코스가 이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진 않았었다. 그가 필리핀 국립대학 출신이라는 것은 필리핀 북부의 라왁이라는 곳을 여행했을 때였다.


기다란 필리핀의 섬들 중에서 가장 북쪽 끝, 서쪽 해안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지역이 일로코스 지방이다. 마르코스가 태어난 고향이며, 이 지역 사람들이 아버지 마르코스와 아들 마르코스까지의 정치 세력을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다.


마르코스는 21년의 독재 이후 시민혁명에 의해 필리핀을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60년대에는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다던 필리핀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를 만들고 1986년 도망쳤지만, 5년 만에 그의 아들을 다시 지역 주지사가 되어 정치 무대로 돌아가게 만든 지역의 뿌리가 일로코스 주였다.


그때 그의 시신은 다시 일로코스로 돌아왔는데 그의 아내인 이멜다가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전까진 시신을 모실 수 없다고 하여 마르코스 기념관을 세웠고, 북한의 김 씨 일가의 장례식에서 봤었던 그 유리관 안에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미라화 시킨 뒤 기념관에 모셔두었다.


마르코스 기념관
바다가 보이는 푸른 초원 앞 마르코스의 수많은 별장 중 하나
미라화 시킨 마르코스와 이멜다


그 기념관에서 나는 그의 필리핀 국립대학시절의 사진을 처음으로 봤다. 무장군인으로 독재정권을 21년째 유지했기 때문에 그의 커리어가 군인이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의 전공은 사실 법학이었다.


그가 일로코스에서의 유명세를 넘어 전국구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한 살인 사건인데, 그가 21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아버지의 정적과 연루된 살인사건이었고, 처음에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그는 대법원에서 변호인 없이 스스로를 변호해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는 법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법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 20대에 아버지의 정치적 라이벌을 총으로 죽이고, 그 후 독재자가 되어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을 죽이고, 끝내는 자신의 정치적 정적인 아퀴노 의원을 공항에서 암살을 시키며 결국 하와이로 망명할 때까지 그는 그 법이라는 수단을 자신과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이멜다를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일로코스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법학과에서 언제나 수석을 차지했었다는  안내문과 사진을 걸어놨지만, 정작 그가 다닌 필리핀 국립대학교 내에서는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필리핀 국립대학 캠퍼스에는 없는 그의 학생 흔적



윤석렬에게 김건희가 있다면

마르코스에겐 이멜다가 있었다.


그가 아무리 지독한 독재자였다고 하더라도 필리핀 사람들이 그보다 더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그의 아내 이멜다였다. 필리핀 북부 일로코스 지역을 가면 마르코 그의 기념관과 그의 별장을 가볼 수 있듯이, 필리핀 중부 가장 동쪽 아래쪽에 있는 ‘사마르‘ 섬 지역에 가면 이멜다 기념관과 그녀의 별장이 있다.


마르코스 가문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지역이 일로코스와 이 사마르 지역이다. 이멜다는 지역의 미인대회 출신으로 마르코스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와 사귀기 전까지 매일같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나씩 선물로 주다가 대통령의 와이프가 되고 싶지 않느냐는 말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 역시 가장 잘나온 사진만 나와있다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는만큼 늘어나던 그녀의 신발


그녀의 씀씀이는 6-70년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살았다던 필리핀의 경제를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국민들의 옷이 얇아질수록 그녀의 옷장은 더 늘어났다. 빈민촌의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그녀는 국민들의 ‘패션감각’을 높여주기 위해 그 많은 드레스와 속옷과 구두들을 사모았고 결국 그녀는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필리핀의 국격을 추락시킨 이멜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렇게 21년의 독재 끝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마르코스의 일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멜다는 지금 필리핀 대통령의 어머니로 여전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한없이 치장한 모습으로 언론에 부끄러움 없이 나타난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마르코스의 시신을 결국 국가의 대통령들을 모시는 국립묘지에 이장했으며, 그녀의 아들 딸 모두 필리핀의 주요 공직 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지금껏 필리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어딘가 너무나 닮은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은가? 아마 윤석렬은 마르코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김건희는 누구보다 이멜다처럼 될 수 있을 거라 믿을지도 모르며, 그들의 잘못을 어떻게든 덮으려 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어찌 되든 이번만 잘 넘기면 필리핀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고 그들이 다시 정치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필리핀 같은 나라들을 제일 많이 무시한다. 자신들이 그렇게 한 나라를 말아먹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특히 아직도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우리는 우리 지역, 우리 당만이 아닌 우리나라 전체, 대한민국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항상 보이는 대로만 무시하던 그 필리핀의 지금이 곧 우리나라의 미래가 될 것이다. 독재시절 수없이 목숨을 잃은 가족들 앞에서 이멜다는 여전히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독재시절에 부리던 사치를 그대로 누리며 반성은커녕 잘못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이 죽인 아퀴노 가문과 시민운동이 필리핀을 더 위험에 빠뜨렸다고 잘못을 돌린다.


언제 국가는 망하는가?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도자일 때, 그리고 그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벌을 받게 하지 않고 우리가 남이가라고 어느 순간 풀어주고 또다시 표를 주고 정계로 불러들일 때, 그때 국가는 망한다.



오바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어떤 위치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미국. 그 미국인들의 절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인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지금 한국의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각자가 나와 다르게 보이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에 어느 정도 관용(forbearance)을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민주주의의 핵심“인데

“비교적인 동질적인(homogeneous) 국가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이번 주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한국을 봐라, 민주주의가 이렇게 어렵다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질문이 들었다.

그는 과연 미국과 한국을 비슷한 수준에 두고, 미국이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한국도 지금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했던 것일까?

아니면 필리핀을 보며 그 옛날 우리나라 같다며 한수준 내려다보듯 말하는 한국사람들처럼 ‘거봐라, 민주주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 우리 정도는 돼야 유지할 수 있다.’라는 의미였을까.


그 의미는 오늘 국회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정치 선진국으로써 민주주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작이 될지, 아니면 그것이 너무나 어려워 그냥 우리끼리 우리 정당의 이익과 사사로운 감정만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부끄럽게 만들 것인지는 오늘 국회에 달렸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나라가 애틋하고 잘되길 바란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고 국회의원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까지 그 결정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를 참고 싶지는 않다고. 부끄러워야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야 하며, 잘못을 저지를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머지않는 미래에 마르코스와 이멜다처럼, 제일 예쁜 각도에서 찍힌 사진으로만 도배되어 일면에 오르는 김건희와 극우유튜브에서 퍼트리는 루머만으로 계엄령을 터트리고도 버젓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제2, 3의 윤석렬, 김건희를 생산해 낼 것이다.


물론 한 나라를 들어내는 것에 있어 꼭 대표자와 정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치안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필리핀으로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자연의 매력이 있고, 조금 더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되는 사람들의 매력도 있으며, 오랜 식민시간 지워진 다채롭고 아름다웠던 문화의 힘도 있다.


다만 그 수많은 아름다운 매력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정치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아서 심지어는 후퇴해서 국민들은 자신들이 이런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정치는 사실 국민들에게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존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원천이 되는 것이다. 정치 상황이 좋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매력에 자신감이 넘치지만, 정치 상황이 나쁘다면 우리는 모든 매력을 가지고도 무언가 소심해지거나 부끄러워진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처음에는 항상 외국 것이 가장 좋다고, 해외여행이 가장 좋으며, 이민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내 딸들이 살아가는 이 나라가 우리는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도 알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매력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이제 해외에서도 그 매력을 발견하고 알아가고 싶던 중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중요한 이 시점에 지도자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한 사람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쿠데타라는 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이 폭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폭탄은 그대로 국민들이 떠안게 될 것이며, 국민들이 폭탄을 맞는데 어떻게 당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나라가 잘되길 바란다. 오늘 투표 결과를 결정할 그 사람들도 이 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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