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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우지 않고 잘 먹고살 수 있을까?

비건과 논비건, 모두에게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by 따뜻한 선인장


남편과의 비건 일지를 기록했던 이유


2025년 1월에 시작했던 남편의 비건식은 겨울과 봄, 여름을 지나 가을에 들어서고 있었다. 비건과 논비건이라는 서로 다른 식생활의 싹을 틔운 이후로, 우리는 새봄의 꽃들처럼 여러 가지 모양과 맛의 비건 음식들을 탐구했고 한여름의 열기처럼 비건과 논비건식으로 뜨겁게 다투다가, 가을에 다가설 즘에야 드디어 우리는 서로의 음식에 대해 인정과 포기의 단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새해를 맞이하며 남편이 비건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이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유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의 끝에 우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남편은 비건식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를 했던 것 같지만, 나는 멋모르고 그런 비건식을 먹는 사람과 동거를 시작한 것이기에 나의 추측은 간단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남편이 비건식을 멈추거나 내가 비건으로 식생활이 바뀌어있지 않을까?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라서 우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과 같을 것이라 장담할 순 없지만, 남편과 내가 겨울,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이하는 지금, 현실은 내가 처음 예상한 것과는 모두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비건식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나는 여전히 논비건식이 내 주식이다. 둘 다 제 고집대로 사는 중인 것이다.


이렇게 직접 시도를 해보고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나는 왜 비건인 사람과 논비건인 사람이 함께 살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처럼 바뀌게 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왜 그가 비건식을 포기하거나 내가 비건이 될 것이라는, 둘 다 각자의 식단을 유지하며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가 싸우지 않고 잘 먹고살 수 있을까?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름의 좋은 면은 다양성이라 불렸지만 그렇지 않으면 갈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잘 어울린다면 반찬이 하나 더 늘어나지만, 얄미운 마음이 들면 하나만 만들어도 될 반찬을 두 개나 만들어야 한다고 꼬아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 바로 비건과 논비건의 조합이었다.


남편이 비건식을 시작하기 전부터, 비건인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상상해 보며 나는 나도 몰래 우리가 다툴 일 들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직 겪어본 적도 없는데 이 걱정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인지.


너무 잘 만든 드라마나 노래는 첫사랑이 없던 사람에게도 마치 자신에게 첫사랑이 있었거나 이별을 겪어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데, 신기하게 비건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인 것만 같았다. 아직 시도해 본 적도 없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은 특정한 이미지와 상상이 비건에게는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자주 부딪치는 상황들 말이다. 나는 우리의 식생활이 달라지면 남편과 자주 다툴 줄 알았다. 그건 단순히 어떤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지, 치약을 어떤 방법으로 짜야하는지에 대한 차이가 아니라, 거의 서로 다른 종교나 정치적 견해처럼 개인의 두터운 신념을 두고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이어가는 다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민초가 좋은지 싫은지, 짜장면과 짬뽕을 사이에 둔 서로 다른 개인의 취향은 당연히 가능하다 해도, 비건과 논비건인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왠지 같은 식탁을 써도 함께 밥을 먹을 순 없는 건가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사실 해외에 살며 나는 밥이 아닌 음식들도 밥처럼 먹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이틀에 한 번은 꼭 밥을 먹어야 했고, 남편은 감자와 빵과 밥 사이에서 밥이 가진 그 특별하고도 우월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가 비건이 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이미 다른 식생활에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미 다른 식생활에 비건식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특별히 더 어려울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공통점이 부족한 우리 식단에 이제 비건까지 추가된다면 과연 우리가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굶어 죽는 일은 없겠지만 내가 특히 걱정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무언가를 씹고 있으니 분명 배는 차는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 밥이 아닌 것들만 먹다 보면 기운은 없고 영혼이 허기지는 대책 없는 사태에 빠지는 증상. 배달음식이나 엄마찬스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증상은 결국 중증으로 가게 되면 내가 과연 이런 기운 없는 것들만 먹으며 해외에서 살 수는 있을까 싶은 절망에 빠뜨릴 때도 있다. 빵과 밥, 치즈와 김치 사이에서 오가던 논쟁들이 이제는 콩과 고기로 번져 가고, 뱃속에는 분명 음식이 있는데도 내 몸에는 ‘기운’이 없어 생활하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외국어로 남편이긴 하지만 한국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국제커플이라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언어가 아니라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음식으로 표현하고 전해지는 사랑말이다. 똑같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음식만 가지고 본다면 엄마와 남편의 음식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연애 초반, 우리가 국제커플이라 언어가 달라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처음부터 많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국제커플이라 달라서 힘든 점이 있다면 그건 언어보다는 ‘밥’과 음식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밥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 뱃속은 물론이고 내 기운까지 충만하게 채워주는 음식이었다. 음식을 통해 엄마의 사랑이 나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엄마의 밥을 먹으면 그 음식들은 특히 내가 힘들 때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곤 했다. 그런 음식들이 나에겐 큰 힘이고 사랑이었는데, 음식만 두고 보면 나는 가끔 남편이 나를 사랑하긴 하나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던 적도 있던 것 같았다.


분명 뱃속은 무언가로 채워지긴 한 것 같은데 신기하게 기운은 하나도 나지 않는 참 이상한 음식들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았다. 무언가를 먹고도 여전히 한참 허기진 느낌이라면 나는 그걸 사랑이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대로 누군가는 사랑을 듬뿍 담아 기운이 나는 음식들을 만들어줬는데 음식을 먹는 사람이 그 사랑과 기운을 별로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 음식은 사랑이었을까?


화학을 전공한 남편은 각각의 재료와 요리 방식이 어떤 화학작용과 에너지를 발생시키는지는 계산할 수 있었지만, 영양소 외에 음식이 채워줄 수 있는 기운과 마음과 사랑까지는 어떻게 만들고 느낄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셀 수 없는 것이 마음이고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 해서 만들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물질만이 아니라 사람의 기운을 채우고 그래서 그 음식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체라는 것을, 배고프면 그냥 빵에 버터와 소시지 한 장 얹어 먹으면 되는 독일남자 남편에게 이해시키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이제는 이 메커니즘을 비건 음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니, 아찔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남편이 비건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가끔가다 한 두 번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루 세끼, 매일 먹어야 하는 주식에 대한 대화일 텐데, 우리는 과연 싸우지 않고 잘 먹고살 수 있을까?



한강 작가님의 책 제목은

왜 비건이 아니라 채식주의자였을까?


그렇게 걱정을 안고 지켜본 비건인 남편과 논비건인 내가 함께 먹은 사계절의 음식들을 돌아보며, 나는 비건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단어가 왠지 모르게 왜 불편했는지 그 이유를 하나 깨닫게 되었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고리는 비건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식단을 바꾸고 나서부터 우리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과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비건'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수백 번 뱉어냈다. 비건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은 많은 질문을 했고, 그러면 남편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그 중간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나는 비건이라는 단어 자체를 수천번 듣고 또 곱씹어 보게 되었다.


사실 비건이라는 이 단어는 우리나라, 한글이 아닌 외래어다. 그래서 한국인인 나에겐 그게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은 와도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와닿지는 않았다. 그럴 때 보통 한국 사람들은 보통 먼저 그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정의에 빗대어 가장 가까운 한국어 단어를 찾아 그 의미를 맞춰보곤 했다. 그렇게 나는 비건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채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비건과 가장 가까운 한국말이라면 채식이 가장 가깝겠지만, 문제는 채식과 비건은 꼭 같다고만 말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채식과 비건의 이미지들 사이에는 서로가 겹치는 교집합이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둘이 온전히 같은 합집합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처음에는 와닿지가 않았는데, 비건인 남편과 비건이 아닌 아내가 함께 사는 우리와 반대로 아내가 비건이고 남편이 논비건이었던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가 문득 떠올랐다.


분명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고기는 물론 생선, 유제품, 달걀도 안 먹게 되는, 먹는 음식으로만 따지면 엄연히 비건인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채식주의자 책의 제목은 비건이 아니라 채식주의자이고, 영어 제목 역시 ’비건(Vegan)‘이 아니라 ‘베지테리언(Vegeterian)‘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차피 ‘채식주의자’를 한국어인 원어로 읽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겠지만, 영어로 번역된 책으로 읽은 외국인들 중에는 이 책의 제목이 왜 비건이 아니라 베지테리언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엑셀 파일을 띄워놓고 칸에 맞게 이름과 정의를 딱딱 떨어지게 적어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징에 따라 나누고 구별해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서양의 사고법에서는 무엇을 먹고 먹지 않는지에 따라 동물성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사람들 전반을 베지테리언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서 어떤 동물성 음식을 먹는지에 따라 고기는 빼고 유제품만 먹는다면 락토, 계란만 먹는다면 오보, 해산물만 먹는다면 페스코 베지테리언 등으로 나뉜다. 비건은 베지테리언 중에서 동물성 식품은 하나도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형태의 채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비건이 무엇을 먹는지만 따진다면 사실 채식주의자 속 주인공은 비건으로 불리는 것이 맞아 보인다. 하지만 서양의 비건인 사람들에게 영혜는 비건이면서도 비건이라고 불리기에는 뭔가 딱 맞아떨어지는 캐릭터는 아니다. 왜 그럴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을 쓰신 작가님도, 또 한글이 원작인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분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 기사를 본 적은 없어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서 오히려 서양의 비건과 우리나라의 채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금 더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비건을 무엇을 먹는지에 대한 식단의 영역에서만 정의한다면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비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정의하는 비건식(Vegan Diet)은 비거니즘(Veganism)이라는 철학,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가 왜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인데, 그 이유에는 보통 환경과 동물에 대한 현재의 인간들의 소비 행위에 대한 비판과 윤리적 배경이 담겨있다. 사람들의 입맛을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착취되고 환경은 파괴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동물성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재료까지 거부하는 하나의 운동이자 철학이 비거니즘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채식은 종교나 건강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건식을 실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서양의 비건에게는 비건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이유에 따라 그들은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처럼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비거니즘을 바탕으로 동물석 식품을 먹지 않는 비건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 자신의 변화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동물들과 지구의 상황도 더 나아져서 결국 세상이 함께 변화하는 것을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수록 대량으로 비윤리적으로 생산되는 지금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하나의 운동이며 사람들이 모이면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철학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의 영혜라는 캐릭터가 채식을 실행에 옮기는 이유는 서양의 비건들에게도 무척 신선하게 다가올 것 같았다. 분명 그녀는 비건이긴 하지만 비건이라고만 말할 수 없으며, 그래서 비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원래의 비건의 사전적 정의보다는 한국의 사회문화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 비건이기 때문에 비건들에게도 그녀는 참 독특한 캐릭터다. 그녀가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가부장제와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것으로 비치는데, 그녀가 자연과 동물들을 얼마나 생각해서 채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나는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음식이라는 매개체가 사회문화경제정치적인 구조속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래서 비건은 단순히 무엇을 먹고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가 어딘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동물을 학대하고 지구를 파괴하는 이 구조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에,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는 가장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 한 점을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는 것의 의미가 누군가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또 그 고기를 맘껏 사 먹고 사줄 수 있는 것이 힘과 부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는 고기를 거절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사회적인 저항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나 힘을 거부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비건은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 속의 행위인 것이다.



비건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들렸던 인류학적인 이유


게다가 비건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만들어내는 구조 자체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일으키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면 비건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려보자. 비건의 정의를 듣고 난 뒤, 당신은 비건입니까?라는 질문을 들으면 답은 네와 아니오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비건은 그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편을 가르는 단어이다. 비건인 사람과 비건이 아닌 사람, 이 두 가지로. 비건이라는 정의가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그 정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논비건이 되는 이분법적 구조인 것이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가지고 인류학자들은 수많은 답을 가정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비스트로스'가 바로 이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 구조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릴 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특징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예를 들면 밝음과 어둠, 남성과 여성, 안과 밖, 깨끗함과 더러움 등의 이분법적 사고가 그렇다. 그는 다양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연구하며, 언어도 인종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인간이면 이렇게 생각한다고 마치 같은 입력값이 주어진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인류학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비건이라는 단어가 이유 없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비건이라는 이 단어에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무의식 안에서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이 '이분법적인 사고'의 구조 안에서는 어떤 하나의 정의가 이와는 정반대의 구분을 낳고, 이 둘은 1대 1인 구조이기 때문에 보통 대립하는 사이가 된다. 비슷한 정의들이 나란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분명히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포함하지 않는 모습으로 대립하고 있다.


비건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그 반대의 지점에 있는 논비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남편이 자신은 비건이라고 분명히 정의할수록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논비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음식 때문인지 단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정반대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구분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레 그 구분 속의 대립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대립은 곧바로 비건과 논비건 사이 불편한 긴장을 낳는다. 레비스트로스는 비건과 논비건 사이의 대립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비건과 논비건 대신 "날 것과 익힌 것"이라는 책을 통해 음식 안에 드러나는 대립을 설명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인간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존재가 아니다. 음식을 통해 자연을 문화로 전환하며, 그 안에서 사회의 구조와 의미를 조직한다."라고 말한다. 인간들은 요리라는 상징을 통해 자연(날 것)을 문화(익힌 것)로 바꾸는데, 우리가 날 것을 먹는지 또는 익힌 것을 먹는지, 그 먹는 방식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육류를 먹지 않는다'는 비건의 의미는 단순히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먹지 않겠다는 음식에 대한 선택만이 아니라, '나는 동물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발전한 비건이라는 개념은 지금의 대규모 공장식 비윤리적 육류 생산 방식과 이를 지탱하는 소비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음으로, 이런 비판적 의견이 확고한 비건들은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식 산업뿐만 아니라 논비건인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상황을 바꾸고자 노력하지 않거나 회피 또는 악화시키는 요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논비건인 사람들에게 음식이란 단순히 무엇을 먹는지 뿐만 아니라 전통과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논비건들에게 고기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음식 속에는 사회문화경제정치적인 배경은 물론 가장 개인적인 입맛과 더불어 개인의 가장 소중한 추억과 그 안의 행복까지 담고 있는 복잡한 매개체일 수도 있는데, 비건들은 이를 무시하고 무작정 육식을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불편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은 단순한 재료와 영양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 도덕을 포함하는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면 궁금할 것이다. 날 것과 익힌 것, 비건과 논비건과 같은 두 가지의 식생활은 언제나 대립하기만 할 것인가?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이분법이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재'를 통해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콩으로 만든 대체육을 먹는다거나, 플렉시테리언처럼 평소엔 채식을 하지만 가끔 고기도 먹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이렇게 이분법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음식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레비스트로스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레비스트로스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비판하며, 오히려 인간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같은 이분법적 내용들이 사실은 권력과 담론의 산물은 아닐까라고 질문했다. 비건과 논비건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조화나 보완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대립'의 관계인 이유는 그 대립의 본질이 음식 자체가 아니라 누가 더 옳고 그른지, 그래서 누가 더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권력이 핵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비건과 논비건이라는 갈등의 핵심은 무엇을 먹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지에 대한 권력의 문제다. 도덕과 윤리가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 맞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맞는가? 옳고 맞다고 생각하는 그 진리들이 절대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인류의 역사상 결국 기록은 대부분 승자에 의해 남겨졌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덕과 윤리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시대와 권력, 담론 속에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리는 무엇이 옳은가를 정해두는 규범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잊고 있던 것들은 없었을까를 되돌아보고 타자의 다름을 수용하려는 태도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구조주의는 비건과 논비건처럼 너무 확고한 이분법적인 경계를 해체하며, 사람마다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다층적 정체성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어떤 사람은 평소엔 고기를 먹지만 환경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는 비건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비건은 가족 모임에서는 예의상 고기를 조금 먹을 수도 있다. 이건 “모순”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만의 이유로 선택하는 자유로운 실천인 것이다.


모두에게 좋고 옳은 결정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건과 논비건이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길은 서로의 도덕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찰하는 대화에 있다. 비건과 논비건 중 누가 더 옳은가를 묻는 대신, 나는 왜 이것을 옳다고 믿는가를 서로 나누는 순간, 윤리는 도덕이 아니라 관계의 기술이 된다. 상대방이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예전보다 하나 더 알게 된다면, 적어도 상대방은 나에게, 나는 상대방에게 각자의 식단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먹는 음식은 달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짧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고 먹지 않을지를 넘어


시작은 분명 남편과 내가 함께 먹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어쩌다 인류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상대주의 이론서들까지 살펴보게 되었을까.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살아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의 궁금증은 단순했다. 과연 그는 비건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비건이 될 것인가?


그가 비건식을 시작했던 겨울에서 봄과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을 맞이하는 즈음에 다 닿고 나니 나의 궁금증은 다른 질문으로 옮겨갔다. 누가 비건이 되고 누가 육식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싸우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실제로 장바구니 속 재료들과 식기, 요리 방법, 완성된 음식까지 남편이 비건이 되고 나서부터 우리 집 식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지만, 그런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의 갈등 요소가 과연 음식 때문만이었을까라는 질문도 함께 쌓여갔다. 무엇이 정말로 갈등을 일으켰고, 시간이 지나고 다시 되돌아봤을 때도 그 갈등은 정말 일어났을만한 일이었을까라는 질문도 들었다.


글을 써 내려가며 내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본인이 비건이라 공감하신 분도 있었고, 우리처럼 논비건과 비건이 함께 살아서 공감하신 분도 있었고, 비건은 아니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공감해 주신 분들도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이 다양한 분들이 어느 부분에서 공감을 하셨는지에 대한 공감의 지점이었는데,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에 대한 공감보다 이렇게 다른 식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갈등에 대한 공감이 더 많았다는 점이었다. 분명 비건은 무엇을 먹고 먹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 같았지만, 사람들이 비건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음식 이상의 무엇이었고, 나는 그것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복잡하고 아리송했던 비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비건인 남편과 함께 사계절의 식탁을 채워가고, 또 인류학 이론을 바탕으로 비건과 논비건 사이의 갈등을 성찰하고 나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듯했다.


그가 비건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정의를 내리고 나서부터, 나도 비건을 어렴풋이 비건과 논비건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우리의 일상을 이해하고 구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그를 지지했던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비거니즘이 가지고 있는 윤리와 환경적 의미, 그 정당성에 대해 공감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가 온전히 비건이 되지 못한 이유는 나에게 음식이란 단순히 윤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가치관만이 아니라 내 어릴 적부터 가족들과 고향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고 먹으며 웃고 떠들던 그 감정과 편안함이 모두 공존하는 나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음식을 통해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자세히 이해하고 바라보게 되었으며, 우리가 먹는 음식에 있어서 육식과 채식의 비율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겠지만 서로가 서로의 식단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마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가능한 대로 비건식을 유지할 것이고, 나는 채식이 주가 되겠지만 가끔은 육식도 필요한 사람으로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그가 비건을 포기하거나 내가 비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우리가 어떻게 같은 주방에서 하나의 식탁을 두고 함께 밥을 먹을 것인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나와 남편,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건과 논비건, 한국인과 그 외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나라 바깥의 지구촌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이슈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얻은 내 결론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거나 맞을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언제나 스스로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그 망설여지는 부분들을 탐색하고 내가 틀린 부분은 없었는지, 있다면 나도 고쳐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어찌 보면 인류학자들의 분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내가 줏대 없거나 신념이 확고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 같은 디즈니 만화라고 해도 포카혼타스와 라이온킹, 모아나와 뮬란, 겨울왕국과 백설공주는 모두 다른 세상인 것처럼, 남아공과 필리핀, 한국과 독일처럼 아무리 같은 인간 세상이라지만 정말 같은 지구별 나라들이 맞나 싶은 나라들에서 인생의 짧고 긴 순간들을 보냈던 나에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질문이 생겼다. 이렇게 모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수많은 다른 사람 중에 나와 남편이 있었고, 수많은 이슈 중에 비건과 논비건이라는 이슈가 우리에게 지금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게 약 1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처음에는 다투면서도 싸움을 줄이게 된, 우리가 함께 식사를 하는 방법을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1. 각자의 주식은 각자 준비한다. 또한 각자의 식단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방이 일을 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서로의 음식을 요리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나 역시 기본적으로 육식을 자주 먹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는 일주일에 한 번만 먹어서 대부분의 음식은 남편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요리하지만 남편의 채식은 나도 먹을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요리하는 시간 자체는 오히려 예전보다 줄어들 수도 있다.


2. 내가 고기를 먹고 싶은 날에는 나는 고기 음식을 만들고 그는 그의 음식을 준비하면 된다. 처음에는 이렇게 맛있는데 왜 함께 안 먹는지 무척 안타깝고 답답하고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함께 먹는지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먹어도 함께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면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고 나는 그의 샐러드도 뺏어 먹을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3.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우리는 각자의 식단을 변경할 수도 있다고 합의했다. 여행이 그렇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휴가를 가는데, 만약 그 휴가가 해외라면 그때는 현지에서 구할 수 없는 비건식을 고집하기보다 현지의 음식을 마음껏 만끽하기로 한다. 더불어 국제커플인 우리의 경우, 그가 한국에 방문할 때에도 우리 가족에게는 음식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듬뿍 받기로 합의했다. 또한 독일에서도 그가 마음껏 주방을 드나들 수 있는 시댁에서는 비건식을 유지할 수 있지만, 성탄절에는 소시지, 부활절에는 계란과 케이크만 무조건 나오는 친척 집에서는 음식보다는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예의상 차려주시는 대로 음식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크게 이 세 가지 기준 안에서 비건과 논비건식을 함께 유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은 다르더라도 하루 한 끼는 꼭 같은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서로 다르니 따로 먹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달라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비건이 된 남편과 함께 1년을 보내며 얻게 된 교훈이다.


비건과 논비건의 담론 사이에는 항상 무엇이 더 옳고 맞는지에 대한 논쟁이 오고 가는데, 나는 비건이 더 늘어가거나 아니면 육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주장보다는 저속노화에서도 주장하는 것처럼 육식이 중심인 식단에서 개인과 환경 모두에게 조금 더 건강한 식단이 주식이 되는 습관으로 바뀌어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비건인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이유에서 이를 주장하는지도 백분 이해하지만, 문제는 논비건인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비건으로 바뀐다는 것은 개인의 건강상태 및 그 주변환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실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비건과 논비건, 두 가지 선택뿐이라면 일반인들에겐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져서 시도조차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시작을 하고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육식 위주의 음식점만큼이나 채식 위주의 음식점도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중요함에도 많은 곳에서 언급은 되지 않는 한 가지의 공간을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도 채식을 먹고 싶은 사람도 함께 갈 수 있는 음식점 말이다.


비건 음식점이 늘어나면 그만큼 비건인 사람들이 갈 곳이 많아지고, 그들의 선택권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비건을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비건이 되면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 선뜻 시도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런던이나 암스테르담, 베를린의 경우, 이 도시들이 음식 자체로 널리 알려진 도시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비건인들에게 천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비건 음식점이 많아서가 아니다. 생각해 보니 베를린에 살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비건이 아니었고 우리 빼고 많은 친구들이 비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먹으러 갈 때 특별히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에선 함께 밥을 먹는다고 할 때 누군가 비건이라고 하면 갑자기 쌩한 공기가 한 바퀴 돌곤 하는데, 그 공기 속에서 비건인 사람은 왜 자신을 배려해주지 않는지에 대한 서운함이 들어있었고, 논비건인 사람은 그럼 자신이 비건식을 먹어야 하는가 싶어 자신이 오히려 배려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또 공기가 차가워진 것이었다. 서로가 서운해 만들어낸 그 쌩한 공기가 독일사람들 중에서도 차가운 사람들이라 소문난 베를린에선 왜 그토록 차갑진 않았을까?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 보니 베를린에는 단순히 비건음식점이 많아서가 아니라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모든 음식 선택권이 가능한 공간에서 논비건인 우리는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됐고 비건인 친구들은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한 식탁에서 각자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논비건인 우리는 비건인 친구들의 음식을 함께 맛봤고, 생각보다 자주 비건 음식도 괜찮고 맛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 그 경험들이 어쩌면 남편이 비건식을 지금 시도할 수 있게 만든 튼튼한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지구가 처한 환경과 비윤리적으로 생산되는 육류 식품을 보면 우리의 주식이 육식에서 채식이 주가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맞아 보이지만, 또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문화적, 신체적 환경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한 음식과 영양소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모든 이에게 같은 식단을 요구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구에게 사계절이 있듯 우리 자신, 우리 몸에도 사계절이 찾아올지 모른다. 나의 마음과는 달리 몸이 아파서 채식을 억지로 먹어야 할 때가 찾아올 수도 있고, 또는 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먹고 싶은 음식을 찾지 못하는 나라에 살거나 먹지 못하는 몸상태가 되는 날이 싫은데도 기어이 찾아올 수도 있다.


단순히 지구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단순히 육식이 중심이 되는 식단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채식 식단을 시도해 보는 것도 분명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중요한 경험의 일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지구의 생명체들이 다양성을 유지해 생존할 확률을 높여왔듯, 자연의 일부인 우리도 우리의 식단을 육식 위주에서 여러 채식종류들로 다양화시킨다면 기후변화 시기와 우리의 건강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써 내려간 이번 에세이에서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누구에게나 식생활의 변화가 생겨나기까지에는 과정이라는 것이 있고, 특히 서로 다른 식단을 먹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먹고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오해와 갈등, 대립과 분쟁이 늘어나는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음식만큼이나 서로 다른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공간과 이를 통해 조금 더 다양한 음식들을 경험하고 서로를 제대로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비건인 분들께는 결국 비건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논비건인 분들께는 그래서 비건식을 더 먹으라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문득 내가 맨 처음 일했던 곳에서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업과 함께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화장품 회사에서는 유기농 제품의 유기농 원료가 아주 미세한 양이라도 괜찮다는 부분을 빼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자동차회사에서는 다른 건 다 괜찮아도 화석연료 부분은 빼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외 다른 분야들도 자신들과 연결된 환경 문제는 빼고 프로그램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연이어 받았었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진이 빠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선배에게 이게 맞는 것이냐고 물었었다. 정작 그 말을 해야 하는 곳에서는 그 말만 빼고 말하는 것이, 그래서 알면서도 그 말을 덮어두는 것이. 아마 선배도 내가 하는 말에 틀린 부분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선배가 그렇게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화장품 회사 교육에서 화석연료의 문제를 말할 수 있었고, 자동차 회사 교육에선 유기농과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있었잖아.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만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말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거라면, 그리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때 그 선배의 말을 나는 조용히 몇 번이나 곱씹었던 것 같다. 그때 그렇게 내가 둘 중 하나를 택해 나머지 다른 사람과 적이 되지 않고, 회사의 사회적 책임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는 분들 그리고 또 환경운동을 하는 활동가분들과 모두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서, 우리가 사실은 서로가 왜 그렇게 행동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도 서로의 이유를 이해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또 내가 몰랐던 그들 나름의 고충을 듣고 나면서 나는 우리가 결국 어떤 부분에선 희노애락을 느끼며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삶에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공감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문제를 고치는 분들도 존경하지만, 또한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서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열심히 연결하는 분들의 수고에도 감사하다.


그래서 내 글은 비건이 읽기에도, 논비건이 읽기에도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 모든 분들이 그리고 지구가 조금 더 건강하게 싸우지 않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물론 남편과 나를 포함해서:) 그것만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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