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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이리쉬 마음의 성당, 세인트패트릭 성당

걸리버여행기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잠든 성당

by 드작 Mulgogi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처럼 아일랜드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해 알면 여행의 즐거움이 더 크다.

아일랜드에서 여행 가이드로 잠시 활동한 경험으로 아일랜드 더블린 명소를 하나씩 소개하기로 한다.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 앞서 세인트 패트릭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세인트패트릭은 누구인가?

그는 5C경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최초로 전파한 아일랜드의 사도이다. 800년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던 아일랜드가 종교 갈등까지 겪게 되면서,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가장 존경받는 성인으로 여겨진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선교할 당시 아일랜드에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문명화된 로마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아일랜드에 사는 켈트족들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켈트족의 선교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원주민에 대한 편견에 굴하지 않고 켈트족을 선교하기 시작했다. 성경 속 인물에 대해 켈트족의 성향에 맞춰 아주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며 가톨릭을 널리 전파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교의인 삼위일체(三位一體;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이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하나의 실체인 하느님이라는 교의)를 설명할 때, 잎이 세 개인 (shamrock, 토끼풀)에 비유해 원주미의 이해를 도왔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으로 하나인 것은 토끼풀이 세 장의 잎으로 이루어졌지만 한 개인 것과 동일하다고 설교한 것이다. 이는 아일랜드 국기와 국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일랜드의 국화는 샴록, 국기에 녹색이 들어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아일랜드를 비롯해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ㆍ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지역에서는 그가 죽은 3월 17일을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로 정해서 기리는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진다. 이 날에는 사람들이 초록색 옷을 입고 세 잎으로 된 토끼풀 모양을 가슴이나 모자 등을 붙이고 행사에 참석해 행진 등을 벌인다. 이것은 성 패트릭이 토끼풀의 세 잎을 보기로 들어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세인트 패트릭 성당 (ST. PATRICK'S CATHEDRAL)


이곳은 전 세계 칠천만 아이리쉬의 마음의 성당이다. 세인트 패트릭st. patrick이 아일랜드를 여행했을 때 이교도에서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했던 우물 근처에 그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다. 성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지금도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현재는 영국 성공회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목조 건물이었으나, 12세기(1192년) 존 코민 대주교가 브리스톨 지역에서 가져온 석회암으로 석조건물로 다시 건축 되었고, 1219년 성당으로 증축하였다.


17세기 청교도 식의 철저한 독재정치를 했던 영국의 재상 올리버 크롬웰이 아일랜드 방문 시 호위군사들이 타던 말을 위한 마굿간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성당의 미놋 타워(The Minot Tower)는 14세기에 세워졌으나,성당은 신성모독으로 수세기간 고통 받았으며, 화재와 무시로 방치되었다가 19C 기네스 가의(Guinness Family) 벤자민 리 기네스경의 지원으로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성당은 초기 영국의 고딕 양식 건축물로서 아름다운 조각과 화려한 바닥 타일, 화려하고 멋진 스태인드 글라스로 꾸며진 창문들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은 교회와 성당의 구분이 뚜렷하지만, 유럽은 규모와 크기에 따라 교회의 규모에 따라 chaple < church < cathedral < church cathedral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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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537.JPG 기네스 가의(Guinness Family) 벤자민 리 기네스경 동상


다음은 성당을 투어할 때 관전 포인트를 소개한다.


Point 1) 헨델의 메시아 초연 당시 파이프 오르간

1742년 헨델(Handel)이 메시아(Messiah)를 조지 프레드릭 헨델 호텔에서 초연할 당시,

사용한 파이프 오르간을 보관하고 있다.


>> 헨델(Handel)의 메시아(Messiah)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음악의 어머니’로 불린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고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판 성경[1] 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메시아(Messiah)[1][2]》는 조지 프레드릭 헨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다. 복음서와 이사야서, 시편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수난을 담았다. 작품번호는 HWV.56.전체 곡 중에서 '주의 영광'과 '할렐루야'가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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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2) 걸리버 여행기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The Travels of Gulliver)>를 쓴 소설가이자 성당의 주임 사제였던(1713~1745년 재직)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와 그의 연인이었던 스텔라의 묘지켈트족의 묘지 등이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연인인 스텔라와의 관계가 사촌 지간에다, 비밀 결혼을 했다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을 거라는 말도 있다. 스텔라가 조나단 스위프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길가에서 비명횡사하였고, 이를 비통해하던 조나단 스위프트는 죽을 때 스텔라와 함께 묻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당시의 사제가 아닌 사람은 교회에 묻힐 수 없었던 관례가 있었고, 이에 스텔라를 여사제로 임명 후 조나단 스위프트와 함께 묻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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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했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를 잃어 백부에게서 성장한 스위프트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여 1700년에는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 대성당의 참사 회원이 되고 그때부터 영국에 머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토리당을 옹호하는 일련의 글을 발표하나, 1714년 독일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가 등극하여 토리당이 실각하자 아일랜드로 정치적 피신을 떠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스위프트는 다시 성 패트릭 성당의 주임 사제 일을 맡으면서 영국의 식민 정책에 의해 수탈당하는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렸다. 1724년에는 소위 『드레피어의 편지』를 출판하여 영국의 아일랜드 내에서의 통화 유통 계획을 비판하여 철회하게 하였고, 1729년에는 『온건한 제안』을 출판하여 아일랜드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아를 영국인에게 식용으로 팔자는 역설적인 제안을 함으로써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에 대한 잔혹한 수탈 상황을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도 그 주요 기제는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지만, 이 작품 역시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 문제를 다루고 있어, 1745년 뇌졸중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위프트에게 있어 아일랜드는 평생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IMG_2552.JPG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IMG_2543.JPG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묘지

>>걸리버 여행기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도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 특히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745년 말년에는 실어증과 정신착란, 발광 현상까지 겹치며 뇌졸중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위프트에게 있어 아일랜드는 평생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걸리버여행기가 사회풍자소설이라면 놀라울까?

※ 걸리버 여행기는 스위프트가 사제 재직 당시, 1726년 집필된 것으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는 물론 영국의 아일랜드 착취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1) 소인국 : 체면과 명분만 따지는 허례허식 관리들을 비판

(책 속에서 구두 모양으로 서로 싸움은 마치 영국 토리당과 휘그당의 투쟁을 풍자)

2) 거인국 : 인간의 나약함과 사악함을 비판

(걸리버가 거인족 왕에서 화약 만드는 법을 설명하자 너희들 세상에서 가장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비판)

3) 라푸타 (하늘을 나는 섬나라) :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만드는 내용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당시 과학에만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 또는 욕망에 가득한 사람들을 풍자)

4) 푸이남 (말의 나라) : 인간의 추악함을 비판

(인간이 자랑스러워하는 문화는 순수 동물의 세계보다 못하다고 비꼼)


그의 대표작인 『걸리버 여행기』는 국내에서 주로 아동소설로 분류돼 왔고, 전체 내용 중 '소인국' 과 '거인국' 편만 축약된 채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원작은 '소인국' 과 '거인국' 편 외에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의 나라' 등이 포함된 전 4부작으로, 18세기 영국의 정치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성인용 대작이다. 인간성의 기본적 모순인 이성적 억제와 동물적 충동 사이의 대립을 토대로, 자유와 전제국가, 진정한 신앙과 환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인간의 왜소한 모습을 풍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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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3) 아일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셀틱 십자가(Celtic Cross)

19세기 우물터에서 발견한 셀틱 십자가(Celtic Cross) 석판이 현재 성당 서쪽 끝 신도석에 보관되어 있다. 10~11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성 패트릭이 노예로 지내면서 배운 켈트족의 언어와 문화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켈트족은 태양과 땅 등 자연을 숭배하는 드루이드교(druidism)를 믿었는데, 성 패트릭은 이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면서 태양을 관통하며 태양보다 더욱 큰 십자가의 이미지(이 십자가가 바로 가로축보다 세로축이 더 길고 가운데 원이 있는 켈트 십자가(celtic cross)다)를 겹치게 함으로써 새롭고 강력한 종교를 전파했다.


POINT4) 그 외,

-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두 명의 아일랜드 대통령 : 더글러스 하이드, 어스킨 칠더스

- 성당에는 하프연주자 털로우 오카롤란(Turlough O'Carolan), 아일랜드 1대 대통령 더글라스 하이드(Douglas Hyde)가 기념되어 있음

- 보일가족 기념물 : 1632년, 17C 코크의 백작 리처드 보일이 두 번째 부인 캐서린을 기념하여 만듬

(그녀의 부모님도 포함하여 조각됨)

※ 17세기 가장 크고 색채가 다양한 정교한 묘를 안치

- 로버트 보일(1627~1691) : 아일랜드 화학자, 현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림

※ 1662년 보일의 법칙(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가 압력에 반비례) 발표

※ 그의 에세이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에 영감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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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잘 맞춰 가면 가이드 투어도 받을 있다. 가이드 투어 시간은 아래와 같으며, 마침 내가 갔을 땐 앤 해서웨이 닮은 큐레이터가 가이드 투어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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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인트 패트릭 (St. Patrick) // 출생 - 사망 : 385년 ~ 461년

시 의회원(decurio)인 그의 아버지 Calpornius는 교회의 부제였고, Bannaven Taburiniae 마을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세인트 패트릭은 St.Patrick은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성 패트릭은 16세 때에 영국 서해안 지역을 침입한 북아일랜드 인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갔다. 그리고 노예가 되어 북아일랜드의 앤트림(Antrim)에서 6년 동안 가축을 돌보았다. 그러나 금식 기도를 하다가 신의 계시를 받아서 해안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아일랜드를 탈출했다. 그 뒤 두 달 동안 갈리아(Gallia)의 여러 지역을 다니다가, 프랑스 남동부 레랑 제도(Îles de Lérins)의 수도원에 머물렀다.


여러 해 동안 수도원에 머무르며 신앙생활을 하던 성 패트릭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꿈에서 다시 아일랜드로 가서 선교를 계시를 받았다. 그는 아일랜드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떠나 프랑스 중북부의 오세르(Auxerre)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곳의 주교인 게르마누스(Germanus of Auxerre)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적인 켈트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432년 무렵에 아일랜드로 건너간 성 패트릭은 북아일랜드의 다운 주(County Down)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아일랜드 각지를 다니며 열성적으로 포교를 하였는데, 그가 세운 교회가 365개에 이르며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람은 12만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그는 445년에 북아일랜드의 아마(Armagh)에 교회를 세워 주교좌성당으로 삼았는데, 성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지금도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성 패트릭은 461년 3월 17일에 죽었으며, 죽은 뒤에 다운 주에 있는 다운패트릭(Downpatrick)의 성당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죽은 뒤에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숭배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무수히 많은 전설과 기적 이야기를 낳았다. 생전부터 이미 많은 전설이나 기적이야기로 채색된 그의 생애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만년에 그가『고백』이란 이름으로 자기의 영적인 순례기를 라틴어로 쓴 서간뿐인데, 이 책은 주교직에 있는 동안 자기에게 가해진 비판과 공격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쓰였다.


영업 :

주중 월화수목금 09:30-17:00

주말 토 09:00-18:00


주소 : Saint Patrick's Close, Dublin 8

위치보기


전화 +353-1-453-9472

홈페이지 : http://www.stpatrickscathedra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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