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elles Adventure Jun 15. 2021

아빠의 요람기

이름도 시골스럽고 촌스러운 행랑골이었다.

이름도 시골스럽고 촌스러운 행랑골이었다. 집이라고는 3채. 


구르뫼라는 낮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는 나무는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소나무만 있고 잔디로 덮여 있었다. 그 산밑에는 밭들이 있고, 그 다음에는 집이 있고, 세 집이 먹는 우물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논들이 있고, 그 옆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애들이라고 해 봤자 일곱 명 정도였다. 


이른 봄이면 논에는 벼의 그루터기에서 벼의 싹들이 나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애들끼리 논을 걸어다니며 풀의 대공만 뽑아 입에 넣어 맛을 보기도 하고 누구 것이 더 질긴지 풀을 서로 엇갈려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한참하다가 누군가가 구르뫼에 올라가 미끄럼틀을 타자고 하면서 누가 빨리 가나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산에 올라가면 잔디가 잘 자란 경사진 곳을 찾아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하였다. 학원에 갈 일 없고 숙제할 일도 없다. 아쉬운 것이라고는 고무신이 찢겨져서 새 고무신을 신었으면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여름이 되면 비온 날 다음 아침에 아이들 중 한 명의 집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떨어진 땡감을 주어다가 항아리에 넣는다. 거기에 물을 붓고 소금을 조금 넣은 후 며칠이 지나면 감이 우러나서 떫은 맛이 없어지고 달디단 감이 된다. 자두나무 밭에 들어가서는 떨어진 자두를 윗도리에 싸서 담아오는데, 집에 와서 보면 옷에 과일 물이 들어서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할머니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또 장마가 질 때면 동네 앞에 있는 실개천에 물이 많아져서 밑에서부터 물고기들이 많이 올라오게 된다. 그러면 집에 있는 채를 가지고 개천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흐르는 물 속에 채를 대고 반대쪽에는 손바닥을 대고 있는다. 물고기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 체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려고 체를 톡톡 치는 느낌이 손바닥을 통하여 느껴진다. 그러면 체를 들어올리는데, 그 안에는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예닐곱 마리 들어 있어 팔짝팔짝 뛰고 있다. 어느 새 물고기가 한 사발 정도 잡혀 있다. 그것을 할머니께서 고춧가루와 고추장, 파, 간장 등을 넣어 조림을 하신다. 너무 맛있는 조림이 되는 것이다. 


한여름 소나기가 올 때면 어떤 때에는 마당에 미꾸라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미꾸라지가 어디서 왔냐고 여쭈어보면 할머니께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신다. 아마 미꾸라지가 날개가 달려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한여름 밤이면 집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 멍석을 펴 놓고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귀신 얘기나 도깨비 얘기가 나온다. 사람이 있으면 멍석귀신이 멍석으로 사람을 뚤뚤 말아 죽인다느니, 달걀귀신이 있어 달걀이 막 굴러다닌다느니, 뒷간에 가서 일을 다 보고 나면 밑에서 손이 나와 빨간 종이로 닦아 줄까 흰 종이로 닦아 줄까 하는데, 이 때 빨간 종이로 닦아 달라고 하면 죽는다느니 하는 무서운 얘기를 한다. 속으로는 무척 무서우면서도 겁쟁이라고 할까 봐 하나도 무섭지 않은 척한다. 


옆집 아저씨는 도깨비하고 씨름해서 이긴 얘기를 하신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에 오는데 동네 산 밑에 왔을 때 도깨비가 나타나 자기하고 씨름을 하여, 이기면 보내 주고 지면 안 보내 준다고 하여 씨름을 하셨단다. 그러면서 도깨비하고 씨름할 때는 도깨비를 왼 발로 넘겨야 이길 수 있다고 하여, 그 말대로 왼발로 걸어 도깨비를 넘어뜨리고 무서워서 막 집으로 달려오셨단다. 


가을이 되면 옆집 아줌마는 베를 짜셨다. 베틀 소리가 철썩 철썩 들렸다. 그 집 누나는 감람나무 교회라는 곳을 다녔는데 그곳에 갔다 올 때면 연필, 공책 같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주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동네 아이들과 방의 따뜻한 아랫목에 들어가 화롯불을 쬐면서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땅에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서 껍질을 손톱으로 빙빙 돌려 가면서 벗겨 먹기도 했다.  


낮에는 얼음이 언 논에 가서, 한 아이는 앉고 다른 아이는 앞에서 끌어 주곤 한다. 그러다가 앞으로 넘어져 손으로 앞을 짚을 수가 없어, 그냥 이마가 꽝꽝 언 얼음판에 부딪쳐서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때의 그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동네는 지금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실개천의 위치도 알 수 없다. 


구르뫼는 공원으로 꾸며져서 가로등이 세워지고,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고, 미끄럼 타던 잔디밭은 배드민턴 장이 되어 버렸다. 






위의 글은 내가 중 1 때 아빠가 쓴 글이다. 당시 국어책에는 오영수의 요람기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었다. 요람기는 화자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했던 놀이와 동네의 특징을 그렸다. 사실 그때 이 글을 읽었을 땐 되게 지루하고 뭐 이런 걸 읽히나 싶었다. 기승전결도 없고 그냥 밋밋한 글이었다. 근데 다시 찾아보니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지 흑흑.


암튼 내가 중 1 때 막 수행평가라는 것이 성적에 반영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국어 선생님이 수행평가 숙제를 내줬다. 숙제는 부모님의 어릴 적 시절 이야기를 듣고 요람기처럼 오마쥬 하는 거였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소설로 써오라고 했다. 당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 딱 30분 낮잠을 자고 명성학원에 갔고, 학원에서 거진 밤 11시까지 공부를 하다 왔다. 이때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 휴. 수행평가를 해야 하는데 집에 와서 다른 숙제 하고 여차 저차 하니 벌써 12시. 나는 거의 울고 싶었다. 실제로 울었을지도 모른다. 전교 10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10점이나 들어가는 이 수행평가를 도대체 언제 다 해.


내가 스트레스받으며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냈겠지? 아빠가 그냥 자라고, 내가 써 놓겠다고 했다. 사실 그때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빠의 약속대로 아빠가 어릴 적 시절을 사계절로 나눠 글을 써 놓으셨다. 쭉 읽었는데 내가 봐도 너무너무 잘 쓴 거다. 양심의 가책 없이 당장 전교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마음에 그걸 고대로 출력해다가 숙제로 제출했다.






그때 이 수행평가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 전교 2등을 했다. 그리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고1 때 아파트 상가에 있는 엄마손 마트에서 중1 때 그 국어 선생님을 우연히 마주쳤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어머 노엘아! 너 주소 좀 알려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중1 때 그 선생님이 교학사 문제집인가 참고서인가를 만들고 계셨는데, 내가 아니고 아빠가 써낸 요람기 오마쥬가 너무 좋다면서, 그걸 참고서에 예시 답안으로 실어도 좋겠냐고 물었었고, 나는 쪼금 뜨끔했지만 별 생각 없이 그러시라고 했다. 마침내 그 참고서가 출간이 됐다면서 내 주소로 한 권을 보내주신다고 했다. 뭐 그러시라고 했다. 그 참고서 답안지에 정말로 그 글이 실려있었다.


그러고는 늘 잊고 지냈고, 내 추억 박스에 들어있었다. 엄마 아빠가 5년 전이었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내 짐 정리를 하라길래 그 참고서를 버릴 까 했던 기억이 난다. 무겁고 부피도 크고. 차마 다 버리긴 그래서 아빠의 글이 실린 그 한 장만 북 찢어서 그것도 제대로 못 찢어서 조각났음 파일에 껴 두었다.


웬일인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부터 그 글이 생각이 났다. 나름 아빠의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나는 아빠가 쓴 글의 첫 두 문장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기억이 났다. 


"이름도 시골스럽고 촌스러운 행랑골이었다. 집이라고는 세채." 


이번 여름 한국에 가서 이 글을 반드시 찾아 다시 읽겠노라고 다짐했고, 엄마 아빠 집에서 몇 시간 동안 박스 2개를 속아가면서 드디어 찾아냈다.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뭉클하다. 







폰으로 찍어 놓고 아빠 글을 타이핑했는데, 타이핑하면서 든 여러 생각이 있다.


우선 친할머니 생각이 난다. 중3이었나 친가 가족들 다 같이 여행을 갔었던 것 같다. 우리는 늘 여름마다 야유회를 가곤 했다. 지금도 다들 가긴 하는데 난 안 간지 꽤 됐다. 밤길을 걷는데 할머니가 달을 보면서 무언가 얘기를 했는데, 그게 약간 전래동화에 나오는 달 이야기였던 것 같다. 당시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내용과는 상충되는 얘기를 할머니가 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요건 요렇고 저건 저런 거다"라며 내 지식을 뽐냈다. 할머니는 자기 어릴 적에는 달이 커다란 항아리라고만 배웠다면서 어쩜 이렇게 똑똑하냐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아빠, 큰 아빠, 작은 아빠가 명절 때 자주 해줬던 얘기가 생각난다. 당시 가장 최고가는 간식은 명태 눈이었다고 한다. 언니나 나는 징그러워서 생선 눈은 안 먹었었는데, 아빠와 그 형제들은 눈이 제일 맛있다면서. 할머니가 동태를 말려 놓으면 서로 그 눈알을 쏙 빼먹으려고 난리였다고. 다 빼서 먹고 나면 할머니가 막 혼을 냈다고.


여름이면 아빠랑 양평이었는지 어디 물이 흐르는 곳에 자주 갔다. 아빠는 투망을 좋아했는데, 투망으로 피라미들을 꽤 잡았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와 나는 튜브를 끼고 물에서 놀고 아빠는 투망을 하고. 그러다가 아빠 주머니 속에 들었던 차키를 잃어버릴 뻔했다. 주머니에 차키를 넣고 안 빠지도록 비닐봉지를 넣어 놨는데, 나중에 보니 비닐봉지는 홀랑 빠져 있었다. 아빠가 잡은 피라미는 우리 집 어항에 넣어 놨던 기억이 난다. 나름 되게 큰 어항이 두 개나 있었다. 워낙 힘이 좋아서인지 피라미들이 가끔 어항 밖으로 뛰쳐나와서 뚜껑을 꼭 닫아 뒀어야 했다. 그렇게 물놀이를 하고 돌아오면 아빠가 썼던 망을 촤라락 베란다에 펼쳐 놓고 말린다. 그러고 나서 찢어진 부분은 아빠가 다 꿰맸다. 그리고 다음에 또 쓰고. 


이건 아빠의 입사 동기들과 여름에 놀러 갔다가, 아빠의 투망 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찍힌 사진.



사진에서 아빠 비율이 거의 4등신 정도로 나온 게 너무 웃기다. 아빠가 저렇게 썰매를 끌어 줬었다. 저때 신었던 저 핑크 부츠 아직도 기억난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이 다시 도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