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홀로 약속이 있는 주말은 남편에겐 찬스나 다름이 없다. 온종일 혼자 보낼 기대 때문인지 몇 주 전부터 설렘이 입꼬리에서 느껴졌다. 아무런 챙김 없이 나갈 채비 하느라 정신이 없어도 전혀 서운해하지 않는 모습이다. 아침 혹은 점심을 어떻게 먹을 건지, 하루 종일 뭘 하며 보낼 건지 등등 암묵의 약속이라도 한 듯 집을 나서면 그때부턴 서로에게 오프라인 상태.
11시도 채 안된 오전 시간에 지하철역으로 나서는 주말이 어색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욱 컸던 순간.
나 역시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나만의 주말이다. 연희동 브라더스에게서 온 초대 핑계로 종일 연희동에서 보내기로 다짐한 날이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볼일이 있어 들른 백화점의 오전 시간은 무슨 일이라도 난 듯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빈손으로 가기도 그렇고 시간도 좀 때울 겸 와인코너에 가서 구경하다가 평소 좋아하던 포트와인이 세일한다는 스티커를 보곤 덥석 집어버렸다.
혼자 있으면 잘 하게 되는 좋아하는 행동 중 하나, 누구와 상의 없이 아무런 고민 없이 물건을 사버리는 일. 그게 선물이면 좋고, 평소 사려다가 못 산.. 망설이던 물건일수록 나에겐 더욱 기분이 좋은 일이다.
긴 지하철 여행 끝에 낯선 동네, 연희동 주택가에 도착했다. 골목길도 익숙해지기 전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된 할머니 댁 같은 푸근한 주택의 2층.
정말 집이다. 남의 집의 거실. 책장과 책들. 테이블과 앉을자리. 창문 밖의 풍경과 햇빛을 함께 간 사람들과 집주인이 공유를 하며 그 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각자 취향에 맞는 책들을 골라 자리로 가져와 한동안 집중해서 보다가 누구 하나 말을 건네기 시작하면 수다를 떨다가도, 책 읽는데 방해되지 않는 조용조용한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한다.
창 밖의 건너편 집 마당을 일제히 부러워하다가 또 조용해지면 책을 읽었다. 토요일 이 시간에 햇살이 한껏 쏟아지는 남의 집 거실에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면서도 참 신기하기만 했다.
연희동 브라더스, 남의 집 도서관이라고 지은 네이밍도 너무 괜찮고, 무심코 생각하고 지나칠 일들도 당연하지 않게 지나치치 않은 두 남자의 결심과 실행하는 추진력까지.. 너무나도 부러웠던 시간과 공간이었다. 아쉽게도 남의 집 도서관은 마지막이라고 들었지만.. 더 좋은 컨셉으로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나길 기다려 본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커피에 케이크와 함께 쉴 새 없는 얘기를 했음에도 부족한 마음에 예전부터 궁금했던 공간을 찾았다. 연희동의 또 다른 매력 공간. '책바 Chaeg Bar' 남의 집 도서관에도 참여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바의 주인 정인성 작가 역시 더 궁금해졌다.
책과 술을 좋아하는 주인이 막연히 생각했던 꿈을 펼친 공간 같았다. 역시 부러운 공간..
한 공간에서 책과 술을 권하는 생각 자체가 기발했다. 책 속의 등장하는 술을 해석하는 방식도 좋았지만 책을 읽으며 감성에 흠뻑 빠지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어쩜 이렇게 잘 캐치했을까? 싶었다.
책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고
술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지만
두 가지를 좀 더 전문적으로 조합해서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어디 하나 이런 말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책바 주인이 전달하려는 신념과 가치관이 공기에 젖어 있었다. 잘 갖춰놓은 공간 안에서 적절한 알코올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묘한 영감들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공간이었다.
들어오는 입구엔 백일장이란 빌보드 차트가 있었는데, 주인이 매달 주제를 제시하면 손님들은 그 주제로 10자 이상의 글을 쓴 뒤 차트에 붙여놓는 시스템이었다. 그럼 다른 손님들이 그 차트를 보며 스티커로 가장 공감이 가는 글에 투표를 하게 된다. 작년에 나온 이 글들로 책을 내기도 했단다.
우리가 술을 마시며 쓴 글
정인성(책바주인) 외 102인_서교동라이프
주인은 손님들과 작은 가치를 공감하며.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멋지다 연희동 사람들. 금세 한 권을 읽었는데 꽤나 멋진 글들이 많았다. 계산 역시 소곤소곤해야 하는 어색하고 색다른 공간이었지만, 하루쯤 온종일 감성에 흠뻑 젖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날엔 제격이다. 그날이 나에겐 오늘이었고 제격이었다. 연희동을 가야 할 이유를 꼽으라면 책바를 고민 없이 꺼낼 것 같다.
감성에 너무 취한 건가. 그냥 연희동이 아쉬웠던 걸까. 최대한 늦게까지 있으려다 막차를 놓쳐버렸다. 너무 편안한 동네 같은 느낌에 잠시 잊었나 보다..라고 하자! 좋은 날이었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남의 집 도서관에서 흘러나오던 이 노래가 오늘까지도 귓가에 윙윙거려 다시 플레이리스트로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