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9
1
덜렁거리는 건 그냥 내 성격이라 극복이 안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잘하다가도 한 번씩 실수를 한다. 어려서는 간혹 준비물을 빠뜨렸다. 옆 반에 교과서를 빌리러 가거나, 체육복을 빌리러 갔던 기억이 난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는 어쩌다 한 번 주문을 잘못 받곤 했다. 인턴을 했을 때는 출근해야 하는 사무실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른 채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날 장소에서 못 만나고 나서야 머리를 쥐어싸며 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여기에 온 걸까, 후회했다.
2
회사에 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월 예상 매출을 계산하는 일을 할 때도 사고를 한 번 쳤다. 꼭 사고는 중요한 때에 벌어진다. 엑셀 한 칸을 실수해서 대단히 숫자가 꼬이게 되었다. 왜 그 한 칸은 꼭 십이월에 놓친 걸까. 회계매출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매출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확인요청을 받았다. 넉넉한 금액을 계산해서 이야기했는데 계산이 꼬였으니 그냥 잘못된 값일 뿐이었다. 내가 말한 숫자만큼 영업팀이 매출을 달성했지만 회계매출은 결국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3
나 때문에 목표 달성을 못한 본부장님이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잘 알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엑셀을 뒤질 때 내 마우스질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왜인지 알게 되면 더 좌절스럽다. 과거의 덜렁댄 나라는 파도가 몰려와서 현실의 나를 무너뜨린다. 이런 걸 자괴감이라고 하는 거지.
4
일하다 만들어낸 실수는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연봉계약 시즌에는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 연봉에 누가 '0'하나만 더 찍어줬으면 좋겠다. 그 농담 같은 일도 내가 했었다. 삼천만 원이 삼억이 되고 사천만 원이 사억이 되어 찍혀 나온 계약서를 내손으로 파쇄기에 잘 넣었다. 연봉 계약을 진행해야 하는 리더들 손에까지 넘어갔던 계약서인데 다행히 본인에게 보이기 전에 발견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5
그때는 처음이고 그럴만한 사정도 있었다. 리더도 너무 자책 말라며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로부터 삼 년 뒤에도 보상 관련 회의를 하다가 내 착오로 계약 내용이 바뀐 적이 있었다. 처음 실수 뒤로는 계약서를 항상 두 번씩 보고, 그러고도 나를 못 믿어서 다른 한 명에게 다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렇게 철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수는 또 일어났다. 그리고 두 번째에도 그 실수의 자리에 의장님이 있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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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예매를 할 때 내 이름 영문 철자가 맞는지 세 번 본다. 동행이 있다면 어지간하면 동행과 함께 표를 끊는다. 날짜나 시간 같은 것들은 눈 네 개로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 남편이랑 같이 티켓팅을 할 때도 두 번 다시 묻는다. 날짜 맞죠? 시간 맞죠? 잘못된 거 없죠?? 혼자서는 못 살 았을 인생인가 보다. 뭐 물론 그렇게 해서 큰일 나봐야 비행기 값 날리는데서 그치겠지만, 그래도 혼자 살았으면 더 자주 했을 실수인데 둘이라서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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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 실수를 하지 않는 생활도 어쩌면 실수일지도 모른다. 자괴감의 쓰나미가 몰려와도 휩쓸려 가는 건 시간이지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또 다른 실수를 할 거고 그것 때문에 괴로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웃으면서 내가 이런 일도 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