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신머리로 여행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2024년 5월 1일, 자정을 넘겼다. 긴 여행의 출발일, 아직 해가 밝진 않았으나 날짜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서울 본가에서 모든 짐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마지막 체크리스트를 확인해 본다. 짐 정리를 마쳤는데 웬 체크리스트이냐 하겠지만, 그것은 여행 준비물에 대한 리스트가 아니다. 퇴사의 당위성에 대한 체크리스트, 이른바 ‘싫은 점 체크리스트’.
싫은 점
1. 가깝지 않아 오래 걸리는 출퇴근
2. 부족한 주차공간
3. 위 두 가지를 해소하려면 8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는 이른 출근
4. 풀타임 근무를 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느껴짐
5. 늦은 출근 혹은 이른 퇴근 후 내 시간을 더 갖는 게 맞다는 생각
6. 지금 조건에서 정시 퇴근한 들 집까지 1시간 30분이 걸려 정시 퇴근이 무의미함
7. 회식하면 택시비는 늘 4~5만 원
8. 멍청한 시스템의 연속
9. 매일 같이 가려야만 하는 나의 카메라
10.
퇴사를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퇴사의 근거를 되새기고자 적기 시작했던 메모이다. 생각날 때마다 한 줄씩 추가해 왔는데, 결국 10개를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9이기 때문에 괜찮았다. 그에 더불어 이미 적은 싫은 점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발현하는 스트레스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나에게 있어 퇴사는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는 선택이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밤, 내 마음의 벨트를 더욱 단단히 매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 체크리스트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자다 깨어보니 다리 옆에 걸리적거리는 것, 그 물체는 부모님의 반려견 콩이다. 결코 늦잠을 주무시지 않는 부모님이시기에, 내가 본가에 와서 자는 날이면 오전 시간 내내 나와 함께 늦잠을 자는 이 녀석. 앞으로 3개월 동안 같이 늦잠 자줄 사람이 없을 텐데, 이 녀석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다 침대에서 한 바탕 놀아주는 것으로 콩이와의 인사를 나눈다.
18시 15분 출발 비행기, 저녁시간대 출발은 아마도 나에게 한도 끝도 없는 여유를 안겨준 것 같다. 오후 세시 반경, 수개월만에 혼자 찾은 인천공항은 언제나처럼 설렘도 안겨주지만, 알 수 없을 긴장감도 함께 물어다 줬다. 그간 열심히 모은 마일리지를 당당하게 쓰는 순간, 나의 등은 배낭을 짊어지고 나의 오른손은 캐리어를 슬슬 끌며 비즈니스 체크인 카운터로 향한다. 비즈니스 체크인을 할 땐 항상 어설픈 티를 내지 않으려 신경을 쓰는 편인데, 그것은 결국엔 금세 만천하에 다 들통날 법한 어색하고도 엉성한 모습이다. 이코노미 체크인 카운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뭔가 외부와 차단된 듯하나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 카운터는 아직도 비즈니스 클래스 사용이 어설픈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기사 나는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자가 아니니 어설픈 모습이 당연할 지도.. 이내 마주한 상냥한 항공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나의 목적지 씨애틀을 알리고 여권을 주고받고 자리와 라운지, 탑승구 안내를 받은 뒤, 짐을 맡기는 중 갑작스레 직원이 의아해하며 나를 향해 묻는다.
“짐이 별로 많지 않으시네요?”
그렇다. 32kg짜리 짐을 두 덩이나 맡길 수 있는 비즈니스 좌석의 특성상, 많은 손님들이 대형 캐리어를 가득가득 채워 정말 묵직한 보따리 짐을 맡기기 일쑤이다. 그런데 나의 캐리어는 기껏해야 13kg 정도, 나의 배낭은 10kg도 되지 않았으니, 의아하다는 표정과 함께 그 질문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 필요한 건 다니면서 사면되죠. 하하핳.”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답하고 넘긴다. 사실 장기여행의 특성상 짐이 많으면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니, 최소화한 짐이 최적인 법이다. 하지만 저 먼 훗날 예정된 돌아오는 비행기 편을 모르는 그 직원은 내 속내를 알 도리가 없다. 뭔가 어설프면서도 머쓱하고, 후련하면서도 홀가분한 그 순간을 지나, 드디어 양손이 가벼워진 나는 자주 찾기 어려운 비즈니스 체크인 카운터를 눈치껏 더 둘러보다가 출국장으로 향한다.
무탈히 출국 수속까지 마치고 간단히 주문해 둔 면세품 몇 가지를 인도받은 뒤, 내가 가야 할 곳은 오직 그곳, 다채로운 공짜술과 공짜안주를 흡입할 수 있는 라운지뿐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아시아나 비즈니스 라운지, 1년 반 전에 엄마를 모시고 태국 방콕으로 효도여행을 다녀온 뒤로 처음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랜만에 비즈니스를 타는 내가 어설플 만도 하다. 그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쌓아온 나의 알코올 내공은 증류주에 조금 더 특화되어 있었으니,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들어서자마자 빠부터 찾아가 라인업을 살펴본다.
스카치위스키 조니워커 블랙라벨
꼬냑 르미 마탱 VSOP
버번위스키 잭 다니엘
테킬라 호세 쿠엘보
증류식 소주 화요 41
화이트 럼 바카디
런던 드라이 진 탱커레이
보드카 스미노프
그간 운 좋게 요상하고 귀한 술들을 많이 마셔서일까, 라운지의 빠는 기본에 충실했다고만 느껴졌다. 무엇 하나 대단하진 않지만, 아쉽다고도 할 수 없는, 무엇 하나 호불호 나뉘지 않는 주종의 선택.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여김과 동시에, 어디선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무리 없이 차려놓기에 좋을 술들이 이런 것들이구나,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현재시각 16:32. 간단한 샐러드 요깃거리를 챙겨다 자리를 잡은 뒤, 여행을 떠나는 늦은 봄의 끄트머리에서 시원하게 나의 구미를 당겨줄 화이트 와인 2종을 택한다. 호주의 울프 블라스 빌야라 샤르도네 2021과 칠레의 타라파카 샤르도네 2022. 마침 또 비교시음하기 좋게 동일한 샤르도네 품종에 유사한 빈티지(수확연도)를 멀찌감치 떨어진 두 나라의 것으로 준비해 주셨다. 나의 샐러드와 어울리는 단 하나의 샤르도네는 둘 중 과연 무엇일까? 정차된 비행기들을 배경으로 호주 샤르도네 한 모금, 약한 잔당감으로 인해 살짝 달큰한 것이 미네랄워터처럼 음용하기에 편안함을 선사한다. 향긋한 시트러스와 핵과류 위주의 샤르도네 향은 덤. 이번엔 칠레 샤르도네 한 모금, 진한 풀내음과 함께 조금 더 드라이하고 쌉싸름한 것이 ‘오늘 낮 식사 짝꿍은 나야 나!’를 외치고 있다. 사실 둘 다 나쁘지 않은 와인이라 모두 맛있게 비워냈지만, 나의 샐러드와 나의 입맛과 조금 더 맞았던 것은 호주의 샤르도네였던 것 같다.
현재시각 17:14. 화이트 와인과 샐러드 페어링을 마치고 나니, 조금 더 본격적인 식사가 떠올랐지만 비행기를 타자마자 기내식을 내어줄 테니 그것은 참기로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입안을 한 번 정리해 줄 술이 무엇이 좋을까? 아무래도 주니퍼베리, 두송실이라고도 불리우는 노간주나무 열매의 화사한 향이 가득한 증류주 진이 좋겠다. 탱커레이라는 준수한 진과 토닉워터가 준비돼 있으니 진 앤 토닉을 말아보기로 한다. 47.3%의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는 탱커레이와 토닉워터를 1:3의 비율로 섞어주면 좋을 듯한데, 아무래도 지거(측량용 잔) 없이 눈대중으로 섞으려니 쉽지가 않아 결국 술이 많이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나 같은 주당들에겐 일종의 개이득(?)이 아니겠는가. 캐나다드라이의 토닉워터는 그다지 달지 않아 향긋하고 드라이한 진 앤 토닉에 비행기 한 대, 두 대 날아가는 것을 구경하다 슬슬 취기가 기분 좋게 오르고 만다.
현재시각 18:04. 이제 마지막 잔으로 한국의 혼을 내 몸 안에 담아 가 보자. 증류식 소주 화요 41을 얼음과 함께 온더락으로 마련하여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구경하며 쌀 내음을 음미하던 찰나.. 내 귀를 꽉 막아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뚫고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꽂혔다.
“변항식 고객님!!!”
깜짝 놀라 이어폰을 빼고 ‘네?’라고 대답하자,
“지금 빨리 탑승하세요!”
아뿔싸! 세상에!! 미쳤어!!!
시계는 18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 비행기 표에 적힌 이륙시간은 18:15. 이런 멍청이! 18시 15분을 혼자 ‘탑승시작 시간’이라 인지하고 그간 그렇게 술을 쳐마시며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허둥지둥 따라둔 화요를 원샷하고(?) 짐을 챙겨 호다다닥 탑승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이 와중에 술은 또 넘어가냐?). 내 생애 파이널 콜을 들으며, 공항 내에 쩌렁쩌렁 이름이 울려 퍼지는 수치스런 영광을 구하다니.. 여행 시작부터 아주 제대로 꼬였다. 다행스럽게도 라운지와 탑승구가 가까운 거리여서 18시 14분에 탑승에 성공. 민망스럽게도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분들께서 평온히 벨트를 매고 앞만 바라보고 계셨다, 허허. 그나마 좌석이 1인석이라 옆으로 아무도 없었기에 덜 쪽팔렸지. 허둥지둥 들고뛰고 했더니 5월의 첫날인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그새 승무원께서는 내게 다가와,
“고객님, 주스나 샴페인 드시겠습니까?”
“아, (멍청한 저는) 물이나 마실게요!”
이 얼빠진 똥멍청이에게 더는 술이 필요할 리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 또 이런 실례를 거듭할까 걱정스런 마음과 함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비행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광활한 활주로로 이동했고, 엔진은 점차 강한 소리와 함께 박차를 가했다. 여전히 진정하지 못한 멍청이의 심장박동 비트와 함께 긴긴 여행의 서막은 그제서야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십여 분 뒤 그 얼빠진 똥멍청이는 승무원에게서 메뉴판을 받자마자 와인 리스트를 확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