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퇴근하고 온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있잖아, 내가 굉장한 걸 발견했는데 여기 고도가 높아서 연비가 좋아졌어. 오늘 기름을 채웠는데 420마일이나 되더라고. 원래 390마일 정도였거든. 공기 저항이 낮아서 그런가 봐.” 나는 기압이 낮아서 연비가 좋아졌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정확한 고도를 찾아본 후 바로 수긍하게 되었다. 산타페의 해발 고도는 2,194m로 한라산보다 247m나 높았다. 그제야 그간의 수상했던 일들이 명확히 이해되었다.
먼저 밥이 설익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러 번 이사하는 동안 압력밥솥의 속 뚜껑이 사라졌다는 점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별문제 없었던 밥솥이 산타페에 와서 계속 설익은 밥을 지었다. 삼박사일 차에 실려 오느라 밥솥이 고장 난 줄 알았는데 기압이 낮아서 생기는 문제였다. 마트에 가면 밀폐 용기나 과자 봉지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는데 타 주에서 배송되는 와중에 기압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부푼 것이었다.
이런저런 힌트가 있었는데도 기압이 낮은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애리조나주에서부터 서서히 고도가 높아져 이곳이 특별히 높은 지대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정확한 고도를 확인한 후로는 틈만 나면 “기압이 낮아서”를 소환했다. 걷다가 힘들어도 기압이 낮아서, 음식이 맛이 없어도 기압이 낮아서였다. 한 번은 수영장에 갔다가 겨우 한 바퀴를 돌고서 숨이 차 헉헉댔다. 우리는 기압이 낮아서 힘든 것으로 이유를 퉁치고 곧바로 수영장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수영하러 가지 않았다.
사실 낮은 기압보다도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낮은 습도였다. 한국에 비하면 캘리포니아도 건조한 편이었는데 뉴멕시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산타페의 맑은 날 습도는 20%도 채 되지 않았고 어떤 날은 10% 미만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첫날 아무 준비 없이 밤잠이 들었다가 둘 다 심하게 기침을 하며 잠이 깼다. 목 안쪽까지 침이 바싹 말라 있었다. 다음 날 가습기도 사 오고 젖은 수건도 널고 자리끼도 준비했지만 건조한 공기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무리한 일정으로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남편은 평생 안 걸리던 기침감기가 들어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산타페의 건조함은 잠을 방해하는 것 외에도 일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날 구운 촉촉한 바게트는 하룻밤만 지나면 돌덩이처럼 굳어 먹을 수가 없었다. 마당 의자는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정전기가 일었고, 차 문을 열 때도 항상 전기가 통했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다가도 해만 뜨면 빛의 속도로 바닥이 말랐고, 그런 이유로 스프링클러가 없는 길거리에는 나무 대신 선인장이 자랐다. 여름 내내 쏟아지는 폭우 속의 선인장이 모순처럼 보였지만, 바싹 마른 공기 속에 서 있다 보면 이해가 되었다.
산타페는 여름이 가장 건조했기 때문에 에어컨에 습기 공급 기능이 딸려 있었다. 습기를 제거하는 한국의 에어컨과는 정반대 기능이었다. 또 에어컨을 켤 때는 창문을 모두 열어야 했는데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갑고 습한 공기가 덥고 건조한 공기를 창문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서 같은 에어컨도 이렇게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자동차 창문이 멈췄다. 센서가 고장 난 줄 알고 수리를 맡겼지만 수리공 앞에서는 잘 작동해 퇴짜를 맞고 돌아왔다. 창문은 평소에는 잘 동작하다가 어쩌다 먹통이 되곤 했는데 닫힌 채로 열리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열린 채로 비가 오거나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때는 정말 곤란했다. 우리는 한참을 관찰한 후에야 이 문제가 온도 및 습도와 관련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난히 뜨겁고 건조한 날일수록 창문이 잘 멈췄기 때문이다.
창문은 캘리포니아에 돌아온 후로도 종종 멈췄다. 역시 점검을 받을 때마다 고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얄미울 정도로 잘 작동해 이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임시 해결책을 찾긴 해서 창문 버튼을 누른 채로 차 문을 세게 닫으면 창문이 다시 움직인다. 종종 가던 길을 멈추고 차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산타페의 기억도 함께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