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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할아버지와
열쇠 분실 사건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by 황경진

에르네스토 할아버지와 열쇠 분실 사건

결혼 후 8년째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은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동향, 동문이라는 성장 배경에서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은 거의 일치하는 면이 없다. 특히 조용하고 소심한 나와는 달리 대담하고 여유가 넘치는 남편은 웬만해서는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일이 없다. 매일 여덟 시간 이상 꿀잠을 자고 일어나, 세상 행복한 얼굴로 빵이나 고구마를 오물오물 먹으며 유머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을 보면 이 사람에게도 근심, 걱정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의문이 들곤 한다. 남편은 수능 시험을 치다가도 낮잠을 자고, 중요한 회사 면접에 지각하고서도 허허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소한 일로도 크게 고민하고 소화 불량과 수면 장애를 달고 사는 나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평온과 평정의 세계에 남편은 살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런 남편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남편은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지는 상황에 크게 동요했다. 이때만큼은 남편과 나의 태도가 정반대로 뒤바뀌어서 남편은 강박에 가까운 불안 증세를 보이는 반면,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수습을 시작한다. 4년에 달하는 연애와 그 어렵다는 결혼 준비를 거치면서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우리는 결혼 후 열쇠가 없어진 상황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처음에는 평소와 너무 다른 남편의 모습에 많이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 문제가 어릴 적의 트라우마와 복잡하게 얽힌 것을 안 후로는 나의 무조건적인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산타페에서 머물던 어느 주말, 오랜만에 시내에서 브런치를 먹고 열 군데가 넘는 갤러리를 구경하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왔던 날- 대문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아차렸을 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아침에 남편이 문단속하고 열쇠를 챙긴 것은 자명했다. 그날 남편은 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지 주머니 말고는 열쇠가 있을 곳이 없었다. 입고 있던 청바지의 앞주머니와 뒷주머니를 털어보았지만 지갑도 있고 차키도 있는데 숙소 열쇠만 없었다. 순식간에 남편의 표정이 굳었고,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 큰일 났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선은 집주인에게 연락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동의한 남편이 집주인 알렉스에게 전화하는 사이 집으로 들어갈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마당 울타리를 타 넘는 것은 어려워 보였지만 침실을 통해서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해 보였다. 대문을 돌아 길 쪽으로 난 침실 창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도 창문과 방충망이 모두 열려 있었고, 높이와 크기도 적당해서 충분히 타 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안도했다.


그사이 알렉스와 연락을 마친 남편은 여분의 키가 있으니 잃어버린 열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다만 지금 다른 도시에 있어서 저녁 늦게야 열쇠를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창문을 타 넘어도 되는지도 미리 확인했다. 혹시라도 이웃에게 도둑으로 오해받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알렉스는 아무 문제없다고 했고, 오히려 숙소에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 했다.


열쇠를 잃어버린 것 치고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우리는 당장 창문을 타 넘고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고, 열쇠는 저녁에 다시 받으면 되었다. 열쇠를 분실한 것은 미안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거나 직접 복사해 돌려주면 될 터였다. 내 입장에서는 더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불행히도 남편의 입장에서는 해결된 것이 없었다. 열쇠를 잃어버린 것은 확실했고 잃어버린 열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그럼 이제 열쇠를 찾으러 가자,”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아무 내색 않고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남편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까지 분명 내 옆에 존재하던 무언가가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일은 환장할 노릇이긴 하다. 물건이 없어졌다는 사실보다도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게 사람을 더욱 미치게 만든다. 열쇠를 못 찾아도 좋으니, 타임 슬립이 가능하다면 언제 어떤 계기로 열쇠가 사라지게 되었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픈 심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열쇠를 떨어뜨릴 만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의 이동 경로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전에 주차했던 곳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밥을 먹었던 식당까지 걸어가며 길을 살폈다. 경험상 이렇게 막연한 경우 물건을 찾게 될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열쇠보다 남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길가에 세워진 차들의 밑바닥까지 휴대폰 라이트를 비춰가며 샅샅이 뒤졌다. 식당에 들어가 테이블과 바닥을 훑어보고 직원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열쇠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식당을 나와 주차장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낙엽까지 들춰가며 다시 한번 길바닥을 훑었다.


차를 타고 갤러리가 모여있는 캐년로드로 이동했다. 오후에 주차했던 곳 주변을 꼼꼼하게 수색했다. 역시 열쇠는 없었고 이제 열 개가 넘는 갤러리를 다시 둘러보는 일만 남았다. “그만 돌아가면 안 될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낙담한 남편의 얼굴을 보고 꾹 참았다. 모든 장소를 둘러보기 전까지는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길을 사이에 두고 한쪽씩 맡아서 둘러보기로 했다. 이런 곳에 열쇠가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쇠를 찾았다.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만 응시하며 내부와 정원을 모두 둘러본 후, 아무 소득 없이 첫 번째 갤러리를 나왔다.


다음 갤러리로 이동하기 전 남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맞은편을 살폈다. 남편이 있어야 할 곳에 남편 대신 에르네스토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할아버지는 "에르네스토 마얀스 갤러리(Ernesto Mayans Gallery)"의 주인장이셨다. 정돈되지 않은 백발에 덥수룩한 수염, 코끝에 돋보기안경을 위태롭게 걸쳐 쓰고, 렌즈를 피하느라 눈을 한껏 치켜뜬 채로 사람을 응시하는 할아버지는 첫눈에 보기에도 범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갤러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목이 늘어난 파란색 티셔츠에 카고 반바지, 쓰레빠를 신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처음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말을 걸어왔었다.


“그래, 젊은이들은 어디서 왔는고?”에서 시작된 대화는 꽤 오래 이어졌다. 남편이 컴퓨터 공학 박사라는 말에 뜬금없이 친구의 명함을 내밀며 이 친구가 재밌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연락해보라 하기도 했으며, 정원을 보여주면서 낮잠을 자고 가라고 했다. 작품을 파는 일보다 손님과 대화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괴짜 할아버지는 우리의 여행 계획을 포함해 이런저런 질문을 한참 이어가다가 마침내 대화를 끝내려는 듯 날씨도 더운데 이거라도 가져가라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얼음물 두 개를 꺼내 주었다. 할아버지의 관심은 부담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흥미로웠다. 오며 가며 한 번씩 들러 인사를 건네고픈 사람이었다. 시원한 물을 손에 든 채 주인을 닮아 스스럼없는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전시되어 있던 작품은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고, 할아버지의 인상만 선명하게 남았다.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 다시 들어간 갤러리에는 남편이 난처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젊은이가 허둥지둥 다시 갤러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상황을 캐물어 봤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되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대략 이런 상황이었다.


남편: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찾으러 다니고 있다.

에르네스토: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

남편: 그건 아니다. 집주인에게 연락했고, 일단 창문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에르네스토: 혹시 차키도 없어졌나? 집에 갈 방법이 없나?

남편: 아니다. 차키도 있고 운전해서 가면 된다.

에르네스토: 집까지 갈 수도 있고, 집 안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남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한데,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단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물으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단다.


할아버지는 나까지 안으로 불러들인 후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일장 연설을 시작하셨다. 그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했고, 오래된 갤러리 문이 고장 나 이중문을 설치하게 된 경위 등 수많은 에피소드가 소환되었다. 요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이었는데, 열쇠의 존재 유무로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집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라는 얘기였던 듯하다. 열쇠 하나 때문에 오늘 처음 만난 할아버지로부터 천동설과 지동설까지 등장하는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지만,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만 내가 하면 잔소리로 들릴 뿐 별 소용이 없었을 말을) 열정적으로 대변해주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쳐가며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마침내 말씀을 끝내시려는 듯 날씨도 더운데 얼음물이라도 가져가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이건 데자뷔도 아니고 갑자기 같은 하루를 두 번째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열쇠의 행방은 찾지 못했지만 방금 왔던 이 장소를 다시 찾아오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고,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남편이 이 상황을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살다 보면 열쇠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 엄청난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다고.


밖으로 나온 남편은 뜨거운 햇볕 아래 한참을 서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인제 그만 집에 갈까?"

나는 그 말이 정말 고맙고 반가웠다.


우리는 나머지 갤러리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집이 작은 내가 창문을 타 넘고 들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땀범벅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기대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열쇠는 정말 어떻게 없어진 걸까?


여전히 풀이 죽어 조용히 앉아있던 남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생각났어!" 그대로 차키를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 남편은 트렁크에서 평소 메고 다니던 빨간색 배낭을 꺼내왔다. 아뿔싸! 둘 다 가방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혹시 카페에서 작업할지도 모르니 노트북과 책을 바리바리 챙겨 나갔던 것을. 열쇠는 배낭 앞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있었고, 그제야 우리는 잃어버리지도 않은 열쇠를 찾기 위해 온종일 헤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왜 깨달음의 순간은 이렇게 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남편은 열쇠를 손에 들고 누가 보면 인생 역전이라도 한 것 마냥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그래! 내가 열쇠를 잃어버리고 그런 사람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이제까지의 침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감에 가득 찬 여유로움이 다시 얼굴에 깃들었다. 남편은 열쇠를 찾아서 안도한 게 아니라, 본인이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증명하게 된 데에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덧붙여 침실 창문을 열어놓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앞으론 창문 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잠깐만! 오늘의 포인트는 이게 아니잖아?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건데.

환호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왠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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