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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올 그린?

by 황경진

뉴멕시칸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의 일이었다. 메뉴를 선택하자 종업원이 물었다.

“Red or Green?” (레드 소스로 드릴까요? 그린 소스로 드릴까요?)

나는 둘 다 먹을 수 있는지 되물었다. 그러자 종업원이 대답했다.

“Oh, Christmas! Sure, you made a perfect choice!” (크리스마스 말씀이시군요. 당연하죠. 완벽한 선택이에요.)


뉴멕시칸 식당에서는 한여름에도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자주 들렸다. Red or Green?이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Christmas!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처음 들으면 스파이 암호문처럼 어리둥절한 이 질문과 대답에는 알고 보니 뉴멕시코 음식 문화의 전부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칠리를 매일 먹습니다. 레드 칠리도 먹고 그린 칠리도 먹어요. 오트밀을 제외한 모든 음식에 칠리를 넣어 먹습니다. 칠리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자 행복의 열쇠예요. 칠리 없는 뉴멕시코는 물 없는 물고기이고, 해가 뜨지 않는 낮과 같습니다.” <유튜브 영상, "Chile Addiction in New Mexico"에서 발췌>


뉴멕시코 음식은 칠리(chile)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칠리는 고추, 혹은 고추로 만든 칠리소스를 의미한다. 고추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chili'로, 보통은 ‘i’로 끝나는 스펠을 사용하는데, 뉴멕시코주에서는 ‘e’로 끝나는 ‘chile’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다른 지역의 칠리와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데, 특히 걸쭉한 고기 스튜를 의미하는 텍사스 칠리(Texas Chili)와 구분하려는 의도가 크다고 한다.


뉴멕시코 음식은 메뉴만 봐서는 멕시코 음식과 다를 게 없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타코, 부리토, 엔칠라다, 케사디아, 나초 등 멕시코 음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멕시코 음식의 핵심은 칠리 소스에 있었다. 뉴멕시코에서 재배하는 고추로 만든 매운 칠리소스를 곁들여야만 뉴멕시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뉴멕시코에서 재배하는 고추의 품종은 한국 고추보다 두세 배 크면서 육질도 연하고 단맛이 많이 났다. 그린 칠리는 늦여름과 초가을에 수확한 파란 고추를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로스팅한 후 속의 육질을 사용해서 만든다. 우리가 아는 고추의 풋풋한 맛에 불맛과 각종 향신료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적당히 매우면서 감칠맛이 두드졌다. 한 번 맛보면 계속 생각날 만큼 중독성이 강해서 뉴멕시코 사람들이 합법적인 중독(Legal addiction)이란 표현을 쓰는 게 금방 이해되었다.


반면 레드 칠리는 같은 품종의 고추를 빨갛게 익을 때까지 두었다가 햇볕에(혹은 기계로) 바싹 말린 후 가루를 내어 만든다. 즉 고춧가루를 사용해서 그런지 정말 친숙한 맛이 났다. 나는 레드 칠리의 맛을 떡볶이 소스에서 단맛을 10에서 3 정도로 줄인 맛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레드 칠리는 치즈가 많이 들어가는 멕시코 음식과 찰떡궁합이었다. 치즈떡볶이의 맛을 아는 한국인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조합이다. 만약 레드와 그린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면 난처할 뻔했는데 연중 크리스마스라는 행복한 선택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칠리소스는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소스의 맛이 가게의 맛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장, 또는 김치와 닮아 있었다. 한번 맛 들이면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한번은 뉴멕시코주의 화이트샌즈 국립공원에 놀러 갔다가 뉴멕시코가 고향이라는 공원 관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젊었을 적 일자리를 찾아 다른 주로 떠났던 그는 칠리 맛이 그리워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른 주에서는 입에 맞는 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늘 엄마의 된장과 김치를 그리워하는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산타페는 내 고향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집밥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Palacio Cafe(팔라시오 카페)”라는 멕시칸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아침과 점심 장사만 했기 때문에 오후 4시면 문을 닫았고, 비교적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주로 팔았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평일에는 식사 시간을 피해 가면 혼자서도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종종 그림을 그리다가 지친 날이면 이곳에 와서 후에보스 란체로스(Huevos rancheros)나 야채 엔칠라다(Enchilada)를 먹었다.


후에보스 란체로스는 멕시코 농부들이 먹던 새참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한다. 큰 접시에 살짝 양념된 밥과 푹 삶은 강낭콩(핀토빈), 계란 프라이 2개가 올라간 토르티야에 칠리소스를 듬뿍 얹어 준다. 우리나라로 치면 밥과 된장, 김치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 먹는 소박한 식단이다. 재료가 별것 없는데도 팔라시오 카페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기본으로 나오는 핀토빈과 그린 칠리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호박, 양파 등 기본 야채가 들어간 엔칠라다도 어느 식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음식을 먹으며 집밥의 온도를 느끼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끓여 만든 정성이 느껴져서일 테지만 뉴멕시코 음식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아마도 고추에서 나오는 친숙함이 아닐까 싶다. 하루라도 칠리를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뉴멕시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인과 뉴멕시코인 중 누가 더 고추를 좋아할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하곤 했다. 김치 버거를 개발한 한국인과 맥도널드에서 칠리 버거 파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뉴멕시코인은 고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형제처럼 닮았다. 레드 칠리와 그린 칠리가 듬뿍 올라간 뉴멕시코 음식을 뉴멕시코인만큼이나 사랑하는 이방인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에서 온 사람일 것 같았다.


뉴멕시코 음식들
Palacio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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