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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Oct 31. 2022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시험>

시험을 봤다. 몸보다 커다란 제도판을 메고 가방에는 제도 용품과 초콜릿을 쑤셔 넣은 다음 시험장으로 가서, 여섯 시간짜리 시험을 봤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시험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고 절박하게 공부한 다음 시험장에 들어가야 그나마 볼 만한 점수가 나온다. 고등학교 때에는 워낙 자주 시험을 보니까, 학교만 졸업하면 시험을 더 이상 그렇게 힘들게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대학에서도 사회에서도 시험은 똑같이 어렵고 힘들었고, 서술형인 문제에 백지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일곱 살 즈음 받아쓰기로 시작해 취직을 하고 직무 관련 시험까지 아주 많은 시험을 보고 또 보았지만, 시험 시간에 아는 것을 기억해 내는 일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매달 보았던 모의고사도, 모의의 모의고사도, 내신 시험도, 여러 번 보았던 논술 고사도, 수능, 운전면허 시험까지 한 번도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험지를 받고 맨 앞장을 넘기기 전에는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심장이 아주 크고 빠르게 뛰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활용해 내고 말겠다는 결심과 동시에 망해도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잘하고 싶은 고집스러운 마음이 뒤섞여서 뱃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끝나기만 하면 일주일은 펑펑 놀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괴로운 시험 전 몇 분을 버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까지만이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치켜떠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쭉쭉 그으며 내려간다. 문제를 마무리하고 시험지 속에서 빠져나와 정리하는 시간들은 그보다도 더 쏜살같이 지나간다. 제발 빨리 끝나라는 마음이 제발 일 분만 더 늦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뀐다. 어찌어찌 마무리를 다 하고 답안지가 나의 손에서 떠나가면 시간은 그제야 다시 제대로 흘러가는 거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결과는 상관이 없어진다.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풀어진 마음과 함께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동거인이 해 주는 음식과 맥주를 마음 놓고 먹고 마신다. 그런 후련함이라도 있어 시험을 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주변 어른들은 시험을 치는 경험과 반복 학습된 지식들을 밑거름으로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시험이 있는 거라고 했다. 시험을 보아야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된다는 거다. 그렇지만 그래야만 무엇을 알게 되는 건 아니고, 크게 쫄지 않으면서 기억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건너건너 듣기로는 요즘 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는 옛날처럼 시험 점수를 대자보로 붙여 놓는 곳은 거의 없겠지만, 비교와 부끄러움 같은 어려운 마음을 굳이 시험으로 겪을 필요는 없으니,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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