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서울 지하철 출근길에는 모두가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 공기 중에는 피곤과 졸음, 굳은 어깨들의 기운이 둥둥 떠다닌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시간. 그래도 좋은 부분을 꼽으라면 그건 역시 한강을 지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7호선 청담 역을 출발해 짧은 터널을 지나 청담대교로 빠져나오는 순간, 사방은 온통 빛으로 가득해지고 순식간에 공기의 무게가 바뀐다. 지하철의 파리한 등 아래 창백했던 사람들의 낯빛은 따뜻한 햇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난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일렁거리는 물빛을 힐끔거리고, 저 멀리 서울의 풍경에 시선을 던진다. 고작 일이 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확연히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햇빛이 가지는 힘이다.
햇빛을 이야기하면 스페인 남부 지방을 여행하던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건조한 바람, 햇빛이 끝없이 내리쬐어 30도를 훌쩍 넘겼고,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생명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해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의 햇빛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늘진 집에서 오수를 즐기거나 문을 연 어느 바 안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하는 듯했다. 나는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부나방처럼 광장 한복판을 걸어 다니며 '작열하다'는 단어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피부에 쌓이던 열기는 결국 곳곳이 터져나가고 말아 화상 약을 사서 덕지덕지 발랐던 기억이 난다. 한편으로 아이슬란드에서 쬐었던 햇빛은 너무나 미미해서 해가 떴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곳의 겨울은 어둠이 아주 깊고 햇빛이 땅에 닿는 시간도 터무니없이 짧아서, 빛이 비친 자리가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진을 찍다 보면 햇빛이 파도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그러나 꾸준하게 주욱 위치가 바뀌고 구름이 지나가고 햇빛이 닿는 면은 조금씩 달아올랐다 식었다 한다. 수억 수조 개의 것들에 부딪혀 모양을 만든다. 빛이 들어오는 기울기와 색과 그림자의 진하기가 달라진다. 집중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 모양을 관찰하고 있으면 빛이 닿고 반사되고 산란하는 그 자체로도 고요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다가와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기만 해도 의미 있는 장면이 손에 쥐어진다. 그럴 때에는 오로지 햇빛이 사진의 전부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애초에 빛이 없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햇빛이 유독 고맙고 반가운 때가 있다.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오랜 장마 끝에 만나는 해, 실컷 쏟아진 소나기 사이 비추는 한 줄기 햇빛. 널어놓은 옷가지와 이불에 스며드는 따끈한 열기.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온다 했다. 화창하게 해가 뜨는 날이 오 일 남짓일 것이라는 조금 끔찍한 예보를 들었다. 부디 그 예측이 어긋나 실컷 해를 볼 수 있는 여름을 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