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서부터였을까. 나는 고인 호수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별다른 기쁨도 고민도 없고, 더 나아질 것도 나빠질 것도 없는 인생. 그렇지만 호수가 마르면 결국 바닥을 찍고야 마는 그런 인생이랄까. 그러던 중 나는 다니던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갈 정도의 짐만 빼고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다 버렸다. 이것은 나의 무기력했던 과거도 함께 버리고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쓸만한 물건들을 하나둘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내려가 군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성취감 없는 호수 위에 떠다니지 않았다.
호수를 벗어나니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오랜만에 펜을 잡은 손에는 쥐가 났다.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하루 안에는 달성해야 할 크고 작은 목표들이 있었고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다. 비로소 인생이 다시 조립되는 것 같았다. 한동안 떨어져 있던 부모님과 다시 함께 살면서 참 감사한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 속에는 때때로 연락해준 사람들의 고마움, 첫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의 좌절감도 포함되어 있다. 힘이 없으면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배웠고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매일 바라보던 밤하늘에 걸린 달이 차고 기울기를 여러 번, 최종 합격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무언가 정돈되지 않았던 인생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지금, reset 된 나의 인생을 조금 더 나은 것들로 채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