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도시 한 복판에서 여행이 내게 묻다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들에게 동남아시아 여행이란 먹고, 쇼핑하고, 마사지 받는 것으로 치환되곤 한다. 특히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 방콕 같은 대도시라면, 그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삼계명이 되어버린다. 그중 하나라도 빼먹었다가는 말 많은 친구에게 도대체 가서 뭘 했냐고 꾸중을 들을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가이드북만 대충 펼쳐보아도 온통 쇼핑에 관한 정보로 도배되어 있다. 딱히 물가가 싼 것도 아니고 유명 브랜드 원산지도 아니지만, 비행기 타고 외국까지 갔으니 뭐라도 사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을 부추긴다.
쇼핑은 차치하더라도 쇼핑몰은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듯한 더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시원한 에어컨이 하루종일 풀가동되는 열대 도시의 오아시스. 에어컨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더워지는데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게 되다니, 다큐멘터리에서 본 쓸쓸한 북극곰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원래는 야생의 여러 동물 중 하나였을 인간이 어쩌다 이리도 나약하게 문명에 길들여진 것일까, 하는 심오한 생각은 쇼핑몰에 들어서자마자 상쾌한 에어컨 바람결에 흩어져버린다.
세상 어딜 가나 쇼핑몰 풍경은 다르지 않다. 공들여 치장한 여자들이 삼삼오오 쇼핑백을 들고 서로 걸친 옷을 봐주면서 이 상점, 저 상점을 표류한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지라도 남들에게 보이는 모든 것에 목숨을 건다. 주말마다 교회를 가는 신실한 신도처럼 사람들은 쇼핑을 하러 간다. 기도를 하듯이 정성을 다해 물건을 고른다.
우리는 물건을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든다고 믿으며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들을 쇼핑몰에서 흘려보낸다. 무엇을 더 사서 두르고 걸쳐야 아름답다고 느낄까. 무엇을 더 사서 집 안에 쌓아야 풍족하다고 느낄까.
그러한 모습을 짐짓 한 발자국 빗겨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머무는 삶이었다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벌고 쓰고 벌고 쓰는, 무한 반복의 쳇바퀴를 숨차게 돌았을 것이다.
여행자가 된 후로 나는 이따금씩 쳇바퀴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힘차게 쳇바퀴를 뛰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한심하다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돈을 벌지도 않거니와,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 외에는 거의 돈을 쓰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배낭을 짊어지다보면 자연스럽게 욕심을 내려놓게 된다. 괜한 욕심을 부리면 그것은 배낭에 켜켜이 담겨 고스란히 어깨를 짓누르니까.
길 위에서 나는 예쁜 옷이나 비싼 가방, 넓은 집 따위 없이도 행복한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익숙한 삶으로 돌아가 한 자리 차지해 살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소소하고 소박하게 행복할 수 있을까. 배낭 하나만큼의 무게를 머무는 삶에서도 지켜갈 수 있을까.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하는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걸어 나와 언제라도 혼란과 두려움의 파도로 뛰어들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낯선 얼굴로 도를 아시냐고 묻는 사람처럼, 낯선 풍경 앞에서 나는 내게 묻고 또 물었다. 여행을 믿느냐고.
이 포스팅은 <첫 휴가, 동남아시아>의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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