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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씨일기 Mar 20. 2024

나 홀로 인왕산, 예상하지 못했던 친절

매일 쓰는 짧은 글: 240320



이 세상에서 나에게 제일 어려운 것, 바로 혼자 하기. 타고나기를 의뢰심이 많아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란 인간.. 모든지 의지하려고만 하고 홀로서는 법을 점점 잊게 되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며칠 전부터 기획한 나 혼자 등산하기 캠페인(?). 거기에 일단 집 밖을 나간 집순이는 한 가지의 콘텐츠로 만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 맛집과 갈만한 카페, 전시회 등을 서칭 완료했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출발하는 것뿐.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예매해 뒀던 전시회의 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터덜터덜 타고서는 독립문역으로 가는 루트로 도전. 인터넷에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 초보자 산이다, 누구나 등반할 수 있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범바위에서 정상까지 가는 길목에 쫄아서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를 정말 분당 3천 번씩은 고민했다.



사진으로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죠.. 전 무릎이 달달 떨렸읍니다


심각한 고소공포증인 나에게 돌 위에 파인 흠만 밟고 그 높은 곳에 의지할 건 밧줄 하나로 10분은 넘게 매달려 가야 한다는 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근원적 공포감을 준다. 거기에 오늘은 강풍도 심심치 않게 불어와서 진짜로 휘청하면 어쩌나 겁까지 날 정도였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나를 흘끗 보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고인물로 보이는 힙한 40대 아저씨(?) 한 분. 휴 내가 원수다, 하면서 나 스스로를 사지에 몰아넣는 기분으로 나도 바짝 엎드린 채 돌을 짚고서는 위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좀.. 많이 안타까웠는지 내 바로 앞에서 계속 뒤돌아보며 나를 살펴주시고 어디 줄을 잡을지, 발은 어디를 디딜지 티칭 해주셨다. 너무나 감사했지만 속으로는 일말의 챙피함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도 조금쯤은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크게, 그 다정함에 오늘 내 인생에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더 쌓였구나, 하는 설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듯이 엎드려 벌벌 떨며 도착한 정상. 정상은 생각보다 뭐 볼 게 없어서 후다닥 브이 인증샷만 남기고 내려가려 했다. 그러다 전의 그 아저씨는 내가 많이 걱정됐는지 내려가는 길은 다른 쉬운 길이 있다며, 어차피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 보통 때 같으면 의심해 봤을 것도 같은 조금은 지나친 호의. 하지만 누가 봐도 인왕산을 3천 번쯤은 왔으며, 헤드셋을 끼고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외국에서 살다 오셨을 것 같은 어휘선택과 자유로움의 냄새에서 그냥 여행길에 만난 다정한 오픈 마인드 아저씨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슥슥 별다른 말없이 앞장서시며, 종종 나의 안위를 살피며 뒤만 살짝 돌아보는 아저씨와 내려가는 길을 함께했다. 그러다 중간에 소개해주신 멋진 곳, 숲 속 쉼터. 원래는 초소였던 곳을 지금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쉼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다릴 테니 구경하고 오라는 친절한 아저씨의 말에 잠시 내부 구경.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지고 눈앞 풍경에 압도된다. 여름에 오면 더 절경이겠구나, 하면서 마음속 버킷리스트를 하나 더 써 내려간다. 계획된 하루에서 벗어나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한 것. 이것도 이불 밖 세상 속으로 나와야 만날 수 있는 일이겠지.





별것도 없는 인왕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만 바보같이 초행길에 무섭다며 벌벌 떨었지만 주변에서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 코트 차림에 외국인들, 츄리닝 입고 누가 봐도 인왕산 아이파크 2차쯤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동네주민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성큼성큼 등반하고 있으니 인왕산이 어려운 산이 아닌 건 맞는 것 같다(루트를 잘 선택하면 지옥계단이지만 무섭지는 않게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누가 뭐래도 오늘 아침까지의 나와는 다르게 이제 인생의 하나의 타이틀이 추가되었다.


혼자 인왕산 정상까지 등반한 사람!





별 것 아니지만 혼자 하는 일에 겁부터 먹는 나에게는 올해의 대상 같은 타이틀이다. 잘했다, 잘했어. 다음에는 좀 더 따뜻한 계절에 시원한 음료를 챙기고서는 다시 와보자.





p.s 산 아랫자락에서 인사를 나누고 아저씨와는 헤어진 길. 미리 찾아둔 식당에서 밥도 먹고 예매해 둔 전시회장에도 도착했다. 도심으로 오니 다들 삐까번쩍하고 이쁜 옷을 입고 좋은 냄새가 난다. 이런 땀범벅의 모습으로 .. 전시회장에 들어가도 되나요..? 잠시,, 실례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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