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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moon Apr 13. 2017

오미자 라이프

문문의 그림일기 #1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어제부로 퇴사했다.


각기 다른 회사에서 두 번의 인턴 기간을 마치고

정규직 전환을 제안받는 과정 중에 공통으로 들은 말이 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늘

'사실은 말이야-' 혹은 '솔직히 말해서-' 따위의 정직함으로 잔뜩 포장되어 나오곤 하는데,

표현이나 단어의 차이가 있을 뿐 말하고자 하는 건 한결같다.


"대한민국에서 결혼 적령기 여성이 취업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줄 알아?"

"요즘 디자인은 누구나 다 해! 게다가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자존감을 발밑으로 끌어당겨

‘어이쿠! 이곳이 아니면 내가 있을 곳이 없구나. 감사하게 여기고 다녀야지'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시커먼 목적인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또 한 번 덜컹- 하고 내려앉는다.


뒤늦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이력서에 줄 세울만한 경력도 적은 '무려 29살'의 내가

과연 이곳을 그만두면 새로운 곳에 취업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부정적인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겨우 한 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야속하게도 땅에 떨어져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생각해볼 시간을 주세요."


휘청이는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을 번 다음

돌아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남자친구부터 가족들(이름 옆에 하트가 한두 개씩 붙어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나 방금 무슨 얘기 들었는지 알아?"


이렇게 터져 나오는 검은 마음들을 급하게 틀어막고

이가 저려올 정도의 달콤한 무언가를 입안에 쑤셔 넣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다음의 과정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첫 줄의 결론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리라.


결국, 나는 그들이 '솔직'하게 말한 세상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일하느니 우아한 백조가 되겠다며

호기롭게 박차고 나온 게 민망할 정도로

바로 뒤이어 찾아온 막연한 두려움이 몸속을 차곡차곡 채워 나간다.


아...내일부터 어떡한담.

안 그래도 텅텅 빈 내 텅장은 또 어쩌고.


크게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침을 꼴깍- 삼켜본다.


쩝. 오늘 내 인생은 확실히 쓴맛이다.


하지만 앞으로 단맛도 신맛도 매운맛도 짠맛도 기다리고 있을 걸 알기에


딱 눈 한 번 질끈 감고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어 삼킬 수 있을 만큼만 씁쓸하다.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5가지 맛이 나는 오미자. 마치 우리 인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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