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 / 비효율성
책방을 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관할 구청에서 진행하는 책방 지원사업에 또 지원할 것인가 말까. 관할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사업인데 동네책방들과 계약을 한다. 사실상 동네책방 매출에 도움을 주려는 예산 지원사업이다. 그런데 이 사업에 처음 참여했을 때 학을 땠다. 10여 곳에 해당하는 관할 도서관에 천권에 가까운 책을 일일이 배달하고 직접 확인증을 받아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구청에서는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책방에 요구하는 서류도 많다. 구청에서 작성한 납품책 목록에는 판매가 안 되는 절판 책도 섞여 있는 경우가 있어서 목록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 책의 납품 가격은 정가가 아니라 10% 할인된 가격이다. 혼자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 달 치 월세를 충당하자는 심사로 사업에 참여했다가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경험을 할수 있다. 책 배달과 서류 문제 등으로 구청 직원과 전화로 실랑이를 펼칠 때면 은근한 갑을관계를 감지한다. 다음에는 참여 안 한다고 다짐을 했다가도 또다시 구청에서 도서납품 사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하면 흔들렸다.
책방 손님으로 만나 친분을 쌓게 된 동네 친구가 있다. 독립영화를 만들며 간간히 글을 쓰는 친구인데 출판한 책이 잘 돼 이제는 어느정도 유명세를 타는 작가가 됐다. 친구는 가장이자 영케어러다. 어린 시절부터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병치레를 전담해며 살았다. 친구는 무명시절 정부의 생활지원 보조금을 받기 위해 구청에 들렀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당장의 생활비가 없어 절박한 심정으로 구청을 찾았는데 준비해야 서류와 까다로운 행정 절차 앞에서 무너졌던 것이다. 친구는 그때를 생각하며 구청 직원들 앞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고 털어놨다.
책방과 연이 닿는 두 경험을 떠올리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오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다. 책방의 경험과 영화에 대한 감상은 최근 들어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폭넓은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론 머스크다.
번지는 머스크 혐오...“그가 미치기 전에 산 차” 테슬라 스티커까지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유력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기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측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아 공무원을 대거 해고하는 등 거친 행보를 보이자 그에게 반발하는 안티[反]-머스크 시위가 온·오프라인에서 확산하고 있다'고 시작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테슬라 관련 시설에 대한 최소 12건의 폭력 사태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테슬라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되는 동시에 테슬라의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테슬라 주가는 지난 10일에 15.4% 하락해 222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하루 기준 4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이다. 머스크는 최근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최근 경영 악화와 관련해 “대단한 어려움이 있다”면서도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안다. (DOGE 일을) 1년은 더 하겠다”라고 말했다.
머스크는 무엇을 위해 고초를 견디고 있을까. 한 마디로 '관료주의 혁파'다. 얼마 전 한 공식행사 무대에 오른 머스크는 "이건 관료주의 대한 전기톱입니다. 전기톱"이라고 외쳤다. 머스크는 규제완화와 더불어 정부 재정 지출 감축을 주도하고 있다. 지출 감축 과정에서 연방정부 공무원들도 대거 해고하고 있다. 사업가인 머스크가 공익적인 마인드로 관료주의 혁파를 밀어붙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료주의로 인한 비효율성에 치를 떨게했던 비즈니스 경험에서 비롯된 신념일 가능성이 높다. 이유와 동기가 어떻든, 그리고 진행과정이 과격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더라도 머스크가 목표하는 바에 대해서 만큼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미국, 아르헨티나, 인도, 영국, EU 등의 정치인들은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번잡한 절차를 없애려 하고 있다. 2020년대 남부 유럽 지도자들이 시장친화적 개혁을 시행한 뒤 빠르게 발전했다. 반관료주의 및 탈(脫)규제는 이제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다. 세계 각국에서 반관료주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관료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시대적 흐름으로 보인다. 반관료주의 자체를 옳다고 평가하는 이분법적 접근 보다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영역에 균형을 잡으려는 반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다만 아직까지 관료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정치인, 기업인, 활동가 등의 개인 또는 그 어떤 집단에서도 '관료주의 혁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끊질기게 실행에 옮긴 사례 역시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 관료주의가 아직은 극으로 치닫지 않아 반발이 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얼마 전까지 여러 사람들과 ‘한국의 관료주의’라는 주제로 공부모임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행정조직의 변화와 관료조직의 특징을 다룬 여러 논문과 자료들을 함께 읽으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눴다. 공부를 할수록 그동안 선출직 공무원(정치인)에 대한 관심만큼 경력직 공무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과 선거제도의 개혁이 더디지만 행정의 개혁은 더욱더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 소장은 우리나라 관료제 문제의 기원을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봤다.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운영됐던 계급제식 행정운영과 의법(依法) 전통이 공무원의 전문성보다는 연줄의 힘을 키웠고, 기계식 법집행과 무사안일주의를 관행으로 굳혔다는 문제의식이다.
우리나라 관료집단에 대한 실상을 폭로하는 목소리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 출판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5급 사무관으로 10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신랄하게 담겨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공직사회는 중앙에서 국가 정책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졌지만,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사내 정치로 내부 동력을 소모시키며, 결국 효율적인 행정 운영을 가로막았다는 것이 저자의 경험이다. 관료주의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용어로 쓰이는 '불쉿 잡(무의미한 노동, 가짜 노동)'을 증명하는 내부 고발이다. 한국의 일론 머스크를 볼 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