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고기> 12장.
같은 시각, 의원실 회의 테이블 위에는 인쇄물이 여러 장 흩어져 있었다. 한쪽에는 그가 만든 캠페인 영상 링크가 적힌 참고 자료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제목이 비어 있는 법안 초안 문건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두 번째 보도자료에서는 법안 내용을 어느정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은 법안 네이밍입니다.” 보좌관이 펜으로 초안 문건의 맨 윗줄을 두드리며 말했다. “법안 내용은 거의 정리됐어요. 남은 건 사람들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간판을 다는 일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처럼...”
테이블을 둘러싼 보좌진들은 각자 적어 온 메모를 펼쳤다. 정책비서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리 과정 고통 금지법’은 어떻습니까? 내용은 제일 직관적입니다.”
홍보비서관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딱딱합니다. 금지라는 단어가 앞에 오면 거부감이 큽니다. 기사 제목으로 쓰기에도 부담스럽고요.”
다른 비서관이 말을 보탰다. “‘동물 고통 방지법’은 어떤가요? 조금 더 포괄적이긴 한데….”
보좌관은 종이에 적힌 후보 문구들을 하나씩 훑어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하려는 건 단순한 처벌 강화가 아니잖아. 조리 방식 자체의 기준을 새로 세우자는 거지. 그리고 금지, 방지라는 단어가 너무 부정적 뉘앙스고. 특히 정치적 여지를 둘 수 있으면 좋겠는데.”
보좌관은 메모지에 어지럽게 낙서를 하다가 한 단어를 천천히 적었다. '윤리적 조리법'
“이건 어때?” 보좌관이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법안 이름을 ‘윤리적 조리법 촉진법’ 혹은 줄여서 ‘윤리적 조리법’으로. 금지와 처벌보다 도덕적 가치를 앞세우고, 기준을 열어두는 표현으로."
회의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홍보비서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치적 입장이라기보다 도덕적 문제제기로 읽혀 부담이 덜합니다. 무엇보다 기자들이 좋아할 거 같네요. 제목으로 뽑기 좋다고."
정책비서관도 메모를 넘기며 동의했다. “입법 취지에도 잘 맞습니다. ‘윤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당 차원의 메시지로도 활용하기 쉽고요.”
보좌관은 짧게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법안 네이밍은 ‘윤리적 조리법’으로 갑시다.”
결정이 내려지자 회의의 속도가 빨라졌다. 보좌관은 바로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이 네이밍으로 오늘 중에 두 번째 보도자료를 배포합시다. 첫 번째 자료가 문제의식과 법안 추진 계획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법안내용을 어느정도 담는 방향으로 갑니다. 법안 추진에 실질적인 속도를 내고 있다는 야마가 뽑힐 수 있게."
홍보비서관이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 “국회 출입기자들 대상으로 우선 발송하겠습니다. 제목은 ‘윤리적 조리법 윤각’로 뽑겠습니다.”
“좋아요. 영상은 첨부 자료로만.” 보좌관이 덧붙였다. “메인은 어디까지나 법안입니다.”
그 말에 보좌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서 그가 만든 영상 링크가 적힌 종이는 다시 한쪽으로 밀려났다. 보도자료 논의가 정리되자 자연스럽게 다음 의제로 넘어갔다. 공청회 기획이었다.
“두 번째 자료 배포 후 바로 공청회 준비로 넘어갑니다.” 보좌관이 일정표를 펼쳤다. “장소는 의원회관 대회의실 아니면 소회의실. 참석자 규모 등을 따져 마지막에 결정하면 되고. 패널은 진보 보수 균형 잡아서.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은 예산국회 시작 전으로. 그럼 11월 중반 정도일 테니 보름 정도 남았네요.”
정책비서관이 말을 받았다. “오프닝은 영상이 좋을 테지만, 아무래도 입법 이야기가 주가 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패널 토론으로 들어가야 할 거 같네요."
“그래요.”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머릿속에 먼저 장면을 남겨야 하지만, 그 장면이 너무 오래가지 않고 문제의식 정도 전해주는 수준으로.”
회의는 점점 더 구체적인 실무로 들어갔다. 당 대표 등 VIP 초청 명단, 토론회 자료집 구성, 의원 축사 문구까지. 그가 만든 영상은 어느새 일정표 한 줄짜리 항목으로 정리돼 있었다.
“어쩌면 실제 입법화보다 중요한 게 공청회입니다." 보좌관은 마지막으로 회의를 정리하며 말했다. "우리 목표는 의원님이 새로운 사회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겁니다."
보좌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덮었다. 회의실 밖에서 전화벨이 울렸고, 의원실의 소음이 일상적인 리듬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회의가 모두 정리된 뒤 보좌관은 휴대폰을 꺼내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보좌관님.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아,, 네. 오늘 내부 회의 마쳤습니다.” 보좌관이 차분하게 말했다. “법안 네이밍은 ‘윤리적 조리법’으로 확정했습니다. 이 이름으로 두 번째 보도자료를 배포할 예정입니다.”
수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네이밍이 생각보다 더 간결하네요.”
“아무래도 짧을수록 쉽게 전달될 겁니다.” 보좌관이 가볍게 웃었다. “영상도 잘 활용할 예정입니다. 공청회 오프닝 자료로 쓰기로 했고, 영감님도 영상을 보시고 만족하시네요.”
“공청회 일정도 잡았나요?” 수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아직 우리 쪽은 준비를 시작하지 못했는데..."
보좌관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보도자료 배포하고, 최대한 빨리 공청회 개최를 개최하는 게 효과적이죠. 그래서 예산국회 전으로 일단 잡았습니다.”
수영은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일단 저희도 일정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공청회 관련 사항은 조금 더 논의하시고 확정하는 걸로 하시죠죠.”
“당연히 그래야죠.” 보좌관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어쨌든 좋은 출발입니다. 이 정도면 당내에서도 충분히 힘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통화를 마친 뒤 수영은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보좌관의 말처럼 좋은 출발일까?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 자신의 리듬과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수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불러 보좌관과 통화한 내용을 간략히 알려줬다. 그는 생각보다 국회 쪽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수용의 무표정이 신경이 쓰였다.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때 수영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야. 우리도 우리 방향으로 속도를 내보자."
수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빠져 보였다. 그러나 뭔가를 결심한 듯 단호했다. 수영은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는 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현듯 그의 어깨가 한쪽을 기울었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은 자리로 돌아가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메신저 창과 이메일 알림이 번갈아 뜨고 있었지만 수영은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봤다. 이내 수영은 짧게 숨을 고른 뒤 화면 속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기사들을 천천히 넘겼다. 그리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깐 회의실에서 보자.'
회의실 문을 닫자 수영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화면에는 방금 올라온 기사 몇 개가 정리돼 있었다. 대부분 국회에서 배포한 두 번째 보도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기사들이었다.
“국회 쪽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네. 바로 배포할 줄 몰랐는데.” 수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분위기는 완전히 의원입법 추진 과정이 중심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사 제목들도 거의 다 법안 이야기네요.”
“그래서 말인데.” 수영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움직이자. 일반 대중하고 직접 만나는 콘텐츠를 더 만들어야겠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 캠페인 영상을 조각 내서 짧은 영상으로 여러 개 편집하자.” 수영의 말투는 사실상 그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짧은 클립 여러 개로. 30초, 1분짜리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SNS에 올리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자르는 기준은 따로 없나요? 혹시 추가할 영상은요?”
“네 판단에 맡길게. 그리고 지금 영상으로도 충분해.” 수영이 말했다. “국회 쪽은 자기들 일정대로 가겠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소통해 보자."
그는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수영은 짧게 대답한 후 바로 시선을 태블릿 화면으로 옮겼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곧바로 편집 프로그램을 열었다. 타임라인 위에 원본 영상을 올리고, 장면들을 잘게 잘라 새로운 순서를 부여했다. 남당리 장면을 짧게 축약하고, 영국 사례 컷은 한 문장으로 처리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국회 쪽 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들이 계속 포털을 채워나갔다. 그는 화면 한쪽에 기사를 띄워 두고, 다른 한쪽에서 영상을 잘랐다.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여러 조각으로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그 조각들이 점점 더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무렵 첫 번째 30초 클립이 완성됐다. 동물과함께 계정으로 업로드하자마자 '좋아요'와 '공유'가 조금씩 늘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포털 화면에 뜬 기사들은 여전히 국회 쪽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수영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화면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욱 치열하다는 사실이었다.
수영은 그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그는 불이 켜진 회의실에 혼자 앉아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봤다. 국회에서 전달받은 일정표와 패널 구성안, 그리고 오늘 올라온 기사들이 한 화면에 나란히 떠 있었다.
그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보다가,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 칸에 이렇게 적었다.
‘공청회 기획안 – 동물과함께 제안’
국회 쪽에서 이미 기본 틀을 잡아 놨다. 그 틀을 바꾸기는 무리라고 수영은 판단했다. 그럼 그 틀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이해관계가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은 천천히 문단을 정리해 나갔다. 오프닝 영상 분량, 패널 구성, 사회자 멘트, 질의응답 순서까지.
특히 패널 구성 부분에서 그는 여러 번 문장을 고쳤다. 학계에서 부를 만한 패널과 요리 전문가 명단을 추가했다. 정치인 패널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시민단체 쪽 패널 후보 명단을 늘렸다. 사회자와 마지막 질의응답 부분에서는 '조율 필요'라는 단어를 넣었다. 문서를 저장한 뒤 그는 보좌관에게 메일을 보냈다.
‘오늘 논의하신 공청회 일정 관련해 저희 쪽에서 정리한 기획안 공유드립니다. 협업 차원에서 검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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