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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태 Mar 21. 2022

뭉클한 '투표 인증'이 불편한 이유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한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쓴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는 문장에 정색을 하는 꼴일 수도 있겠지만, 왜 나는 불편함을 떠올렸는지, 그 생각을 정돈해보고 싶다.

     

“지팡이를 집고 투표하러 가는 어르신들 모습에 뭉클해집니다.” 

20대 대선 투표 날, SNS를 가득 메운 투표 인증 게시물들 가운데 마음에 걸린 한 문장이다. “투표했습니다”, “투표합시다”, “권리 행사!”, “시민의 의무!!” 등의 진부한 게시물보다는 그래도 신선하다. 자신의 권리 행사를 인증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투표 행위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셈이니. 그런데 불편하다. 게시물을 쓴 필자는 꼭 뭉클했어야 할까? 타인의 투표 행위에서 '민주 시민(?)'으로서의 동료애(?), 동지애(?)를 느낀 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동료애, 동지애’ 등의 감정은 아닌 듯하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누군가를 뭉클하게 만들 만한 ‘극기’를 행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페럴림픽 선수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그런 '감동적인 극기' 말이다. 


뭉클하다는 표현이 나오기까지의 어떤 감정 흐름이 있었을까? '지팡이를 집은 어르신들'이란 표현에서 '안쓰러움'이 베어난다. 그렇기에 투표라는 권리를 행사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타인에 대해 동등한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은연하게 우월감을 품고 있는 감정 흐름이 읽힌다.

 

지팡이를 든 어르신들의 행위는 게시물 필자와 마찬가지로 당연힌 자기 권리를 행사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거나 감동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게시물 필자의 솔직한 감정은 ‘뭉클함’이 아니라 ‘대견함’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정확히는 ‘연민’에 기인한 대견함으로 보인다. 그의 뭉클함이 불편하게 다가온 이유다.      


만약 게시물 필자가 공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냈다면 그의 뭉클함에 어느 정도 공감했을 것이다. 지팡이를 집고 투표를 하기 불편하게 만드는 투표장의 시설물,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투표를 하기 어려운 물리적인 요인 등을 지적하는 문제의식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다만 공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뭉클함이라고 해도 불편함이 싹 가시지는 않을 거 같다. 이 같은 뭉클함 역시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이 말한 ‘뻔뻔한 반응’을 수 있는데,  이런 문제의식도 없는 뭉클함이라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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