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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태 Nov 04. 2024

담배 한 개비를 계좌이체

자본주의 즐기기 /저항

"가령 어느 산촌에 그곳 사람들과 전혀 다른(이질적인) 사람이 찾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를 하여 서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함께 보냈을 때를 컨비비얼하다고 말한다."<소박한 자율의 사살가, 이반일리치 中>


"일리치는 '공생', 즉 'convivial'을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작용을 뜻하는 말로 써요."<이반 일리치 강의 中> 


강원도 고성군에서 6박 7일을 보냈다. 퇴사를 결심한 후 가장 길게 다녀온 여행이다. 숙소는 '단기임대 앱'에서 '일주일 살이'가 가능한 아파트를 구했다. 예전에 속초 여행 중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을 통해 구경했던 아파트다. 그때 속초와 가까운 고성이라는 곳을 와봤고, 천진해변 근처인 이 동네를 처음 알았다. 회사를 관두면 이 동네에서 살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억이 있는 아파트가 '일주일 살이' 숙소로도 앱에 올라왔던 것이다. 반가웠다. 바로 예약을 하고 고성으로 떠났다. 


아파트는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다. 한산하고 깨끗하다. 첫눈에 반했던 천진해변 주변은 여전히 제주도를 닮았다. 제주도 협재에 가면 해변 뒤쪽으로 양쪽에 제각각 모양의 작은 상점들이 듬성듬성 이어지는 좁은 거리가 있는데, 그곳을 연상시킨다. 처음 이 동네를 봤을 때 제주도까지 갈 필요가 없네,라는 생각을 했던 이유다. 여름휴가철이 아닌 천진해변은 차분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부동산을 통해 잠깐 집을 보러 왔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일주일을 살다 보니 보인다. 내가 상상하는 삶을 미리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천진해변을 앞에 두고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 아파트에 택배를 옮기는 기사들, 아파트 동별로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는 경비 아저씨, 일주일 사이 단골이 된 고깃집 직원과 손님들, 해변을 중심으로 동네를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경찰관들. 어쩌면 미래에 내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일주일 사이에 운 좋게도 이들 가운데 한 명과 은밀하고도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담배 한 까치만 얻을 수 있을까요?"


저녁을 먹고 쓰레기를 버릴 겸 단지 내 흡연구역으로 왔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 순간, 다부진 몸매를 가진 남자 한 명이 운동복 차림으로 다가왔다.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최대한 겸손한 몸짓이지만 상기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날이 어두워 얼굴빛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 톤에서 '술 한잔 했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죄송할 거 없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사내에게 담배 개비를 건네자 수줍은 듯하면서도 들뜬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가 계좌이체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순간 황당했다. 계좌이체라니. 사내는 담배 한 개비에 대한 대가를 꼭 지불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계좌이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은 못 참았다. 입에서는 어느새 '풉' 소리가 내뱉는 숨소리처럼 나왔다. 곧바로 나는 "무슨 계좌이체예요.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담배를 받은 사내에게서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계좌이체라는 단어에서 향긋한 술 냄새가 베어 나는 듯했다. 사내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손가락으로 가져가더니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와이프한테 담배 한 까치를 빌려서 나온 터라. 너무 부족하네요. 하하."


너스레를 떠는 사내한테 어느새 친밀함이 느껴졌다. 어색한 그의 웃음에 나 역시 어정쩡한 미소를 지우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내에게 "잠깐이라도 편히 피세요"라고 말했다. 사내는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여전히 내 옆에 있던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 


"혹시 사시나요? 주소 알려주시면 제가 우편함에 담배 몰래 넣어 두겠습니다요."


순간 사라졌던 경계심이 꿈틀댔다. 숙소를 예약한 후 집주인은 경비원 또는 동네사람들과 마주칠 기회가 있을 경우 친척집에 온 것으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숙소 대여'에 대한 민원이 있다고 추정되는 집주인의 노파심이었다. 사내의 질문에 집주인의 당부가 겹치며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파트를 가리키며 "저기 103동이에요. 담배는 괜찮습니다. 다음에 여기서 또 보면 그때 저도 한 개비 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스스로도 잘 넘겼다고 생각하는데 사내는 여전히 내 옆에 서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걸려는 눈치다. 나는 담배 불을 끄고 사내를 짧게 목례를 했다흡연구역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사내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외쳤다. 나는 옆으로 살짝 얼굴을 돌려 고개와 허리를 꾸부정하게 숙였다 편 후 숙소로 발길을 재촉했다. 


집에 들어와 와이프에게 방금 흡연구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계좌이체라는 말에서 와이프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와이프는 "친구 생길 뻔했네"라고 덧붙였다. 나는 "여기서 살면 다음에 그 사람 만났을 때 담배 한 대 피우고, 단지 앞 편의점에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할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일은 나이가 들 수록 낯설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너무나 아득해진 삶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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