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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태 Nov 26. 2024

대충 쓰고 있었다

퇴사 결심 전

"길에서 시간 버리지 말자."


수습 딱지를 떼고 배치된 첫 부서의 부장은 깊은 뜻이 담긴 듯한 멋들어진(?) 말로 현장 취재를 막았다. 이때부터 초심이 꺾이기 시작했던 거 같다. 직접 보고 듣고, 기사를 제대로 쓰겠다는 열정은 언론사 입사 1년도 안돼 식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 '기사는 발로 쓴다'는 진부한 언론계 표현을 마음속에 새기고 새겼다는 것이 허무했다.


현장 취재를 나가겠다는 의견을 간단히 내친 부장은 "출입처에서 보내는 자료 좀 많이 처리해 줘"라고 덧붙였다. 출입처는 곧 광고주다. 기자실을 운영하면서 사내 홍보 조직으로 출입기자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자금력이 받쳐주는 대기업이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광고주이자 출입처는 이런 비용을 대가로 홍보용 보도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한다. 자신들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얼마나 많이 또는 잘 포장해서 써줬는지에 따라 광고비가 달라질 수 있다.


"기사 공백기에 대한 방안이 시급해."


기자 생활 14년 차가 되면서 정치부 팀장을 맡았다. 팀장을 맡으면서 초심을 되새겼다. 팀원인 후배기자들의 취재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주자고 다짐했다. 보도자료, 실시간 속보 등의 온라인 기사 부담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같은 날, 같은 내용으로 쏟아져 나오는 온라인 기사에 힘을 빼지 말고 기사 한 꼭지라도 단단하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자기 이름 걸고 나가는 기사에 욕심을 낸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취재하고, 관련 자료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팀장을 달고 얼마 안돼 정치부장은 팀이 위기를 맞았다고 한탄했다. 온라인 기사 클릭이 역대 최악이라는 것이다. 팀에서 자체적으로 방안을 만들라고 닥달했다. 특히 점심시간 전후로 기사 꼭지수가 급감한다 이 시간대를 '기사 공백기'라고 표현했다.


윗분들이 원하는 방안은 정해져 있었다. 제목 장사와 물량 공세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달고,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다. 좋은 기사로 독자층을 넓히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당장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날그날 클릭을 유도할 '낚시 기사'를 최대한 많이 생산해야 한다.


취재 시간을 유지하며 기사 꼭지수를 늘리는 일은 한계가 명확했다. 기사 꼭지수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자 '일을 안 한다'는 식의 지적까지 받았다. 모욕적이었지만 참았다. 어떤 기사를 썼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몇 개를 썼냐가 평가 기준이 되고 있었다.  


결국 매일 온라인 기사를 배당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의무적으로 처리해야 할 기사들이 늘어나면서 당연히 취재 시간은 줄어들었다. 취재를 하다가 기사를 적게 쓰는 날이면 지적질을 감수해야 했다. 취재는 사치였고, 팀원들은 알아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렸다.  그렇게 클릭수가 나오는 타사 기사의 제목을 수정해 베꼈다. 유력 정치인들의 발언은 토막 내서 속보성 기사로 활용했다.


회사의 지적질은 진화했다. 클릭수 방어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내자 '질'을 걸고넘어졌다. 요새 단독기사가 너무 안 나온다, 시의성 있는 기획기사는 왜 보고가 안 등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기획이든 단독이든 취재가 필요하다. 취재에 들어간 시간이 많다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기사 꼭지수가 지적 됐다. 기사 꼭지수를 늘리느라 취재 시간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말은 변명이 될 뿐이었다.  부장은 "회사 방침"이라며 책임 회피성으로 이해를 구하다가도 "온라인 기사 쓰는데 시간이 얼마나 든다고 그러냐"며 면박을 줬다. 악순환을 끊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름 걸고 쓰는 기사다."

기자를 시작했을 가장 신기하고 설렜던 것은 '바이라인'이다. 기사 시작과 끝에 나오는 이름과 메일주소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만큼 기사에 애정이 생기고 독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사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이 컸다. 이름 걸고 쓰는 기사인 만큼 문장 줄, 단어 하나 쓰는데 신중했고 여러 고쳤다. 기사 마감을 조금 늦춰서라도 취재를 조금 해서 기사 완성도를 높이려는 욕심도 냈다. 이런 마음은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수익을 내야 하는 언론사 조직 안에서 오래가지 못했다.


여전히 이름 걸고 기사를 써도 설렘은 개뿔,  책임감은 흐릿해졌고 욕심은 피로감만 더했다. 휴직하기 얼마 전, 같이 담배를 피우던 후배가 한숨을 내쉬며 작심해 온 듯한 말을 뱉었다. 대꾸할 말을 찾은 나는 아무 말이나 했다. 구경하듯 남의 일인 양. 


"선배, 요즘 취재할 시간 없는 거 아시죠."

"대충 쓰자."

"제 기사를 보면 부끄럽네요."

"내 기사 안 본 지 오래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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