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결심 후
記者. 기록할 기, 놈 자.
오랜만에 용산역에 갔다. 내 약속이 아닌 와이프의 저녁 약속 때문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어 바람이라도 쐴 심사로 따라갔다. 와이프가 친구들과 만날 시간이 되면 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와이프의 저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와이프에게 예전에 단골이었던 헌책방에 가자고 했다. 와이프는 흔쾌히 동의했다. 얼마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보물찾기 하듯 한강 작가의 책을 찾는 재미도 영향을 줬다.
지하에 있는 헌책방은 오래된 역사만큼 계단을 내려가면서부터 특유의 꿉꿉한 책 냄새와 맞닥뜨린다. 헌책방 안에 들어가면 책들만큼이나 오래돼 보이는 책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을 맞춰 서있다. 책장들 안에는 온갖 종류의 헌책들이 각자의 레트로한 개성을 뽐내듯이 책등을 내보이며 꽂혀 있다. 와이프는 한강 작가의 책을 찾는데 집중하고 , 난 절판된 책들의 구판을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30~4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빈손으로 출입문 앞에서 마주했다. 나는 얼굴을 찡긋하며 도리도리 했다. 와이프 역시 아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미련 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중간쯤에서 내 발걸음이 멈췄다. 무엇에 홀린 듯 계단 한쪽 벽을 도배하듯 채운 책장을 향해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꺼냈다. 책 제목은 <당신 기자 맞아?>였다. 지금도 어떻게 이 책을 발견했는지 신기하다. 계단 중간쯤에 어중간하게 서서 책을 훑어봤다. 책을 쓴 사람은 당연히 기자인데 모르는 이름이다. 책이 낡은 것으로 보면 오래전에 퇴직한 기자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책 제목 위에는 '오동명 기자가 작심하고 발가벗긴 한국언론'이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퇴직을 결심하고 휴직 중인 난 '나도 한번 발가벗겨볼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방향을 틀어 계단을 내려가 값을 치르고 책을 들고 나왔다.
와이프랑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으면서 지난 기자질을 떠올렸다. 이른바 언론고시라는 것을 준비하던 시절과 언론사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수습기자 시절, 처음 출입처를 배정받고 취재에 열을 올리던 초창기, 우여곡절과 좌절감 강렬한 에피소드 그리고 가장 최근 퇴사를 결심하게 된 사건 등. 시간 순서로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지하철을 타서는 기자질을 글로 남기면 어떤 제목과 주제가 될지를 상상했다. 자본주의에 포획당한 언론 현실, 획일적이고 부조리한 조직 문화, 부당한 지시에 굴복했던 흑역사 등. 상상은 사명감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 언론계에 이름을 남길 만한 탁월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4년을 버텨온 짓인 만큼 내 경험이 한국 언론의 문제를 생생히 고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협심이 마음속에서 꿈틀댔다.
다음 날 노트북을 켜고, 그간의 기자질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부정적인 장면들을 키워드별로 적었다. 다 적고 나니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기레기, 광고주와 애완견, 권력지향, 사적 이해관계, 속보경쟁, 보도자료 베껴쓰기, 클릭 낚시질 등 언론 현실을 지적하는 기존의 글들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문제의식들이 나열돼 있었다. 언론이라는 특정 분야의 직업군에 대한 당사자의 자기고백식 문제제기는 수없이 많은 기록물로 남아있고 현재도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 내 경험까지 끼워 맞춰 보탤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에 적어 놓은 키워드를 전부 지웠다.
다음 날도 어떤 방식과 주제로 기자질 경험을 글로 옮길지 고민했다. 그냥 하루가 지나고 또 다음 날도 제목을 어떻게 할지, 내 경험 가운데 어떤 장면을 어떤 키워드로 연결할지 머리를 굴리다가 끝냈다. 기자질 경험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머리만 굴리다 며칠을 보내니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퇴사가 아니고 휴직이니까, 퇴사를 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쓰는게 맞아', '조금이라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형식과 주제를 고민해보고 쓰자', '다른 기자들의 책이나 기록물을 공부한 후에 쓰자' 등 글쓰기를 미루는 변명을 찾고 있었다.
순간 기자질의 격언이 떠올랐다. '안 쓰면 똥 된다.' 아이템을 잡아 놓고 기사화 시기를 조절하며 기다리거나 추가 취재를 통해 완성도 높은 기사를 만들려는 욕심에 기사 쓰기를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곳에서 같은 아이템으로 기사가 나온다는 의미다. 알고도 물 먹은 꼴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쓸지, 어떤 문제의식을 담을지,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등 정작 쓰지는 않고 형식을 고민하는데 시간으 보내고 있다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기사화가 돼 쓸모없는 아이템이 될 일은 없지만, 마감이 없는 글쓰기라는 점에서 미루다 보면 결국 안 쓰고 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 와이프가 "글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매일 기사를 써대며 살던 나는 의기양양하게 "일단 노트북 키고 써야 해"라고 말하며 흡족해 하던 기억난다. 그때는 공장이 정해 준 마감이 있어 억지로 매일 썼을 뿐이다. 그냥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깨닫는 중이다. 누가 정해준 마감은 거부하더라도 내 양심에 따른 마감에 도움을 받지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지금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