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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태 Nov 12. 2024

가성비 나쁜 삶

퇴사 결심 후

데스크한테는 퇴사 의사를 밝혔다. 데스크 위 편집국장과 면담하면서 휴직으로 타협했다. 육아휴직이 4개월 남아 있었다. 경영지원실에 퇴직금을 문의했는데 단 4개월이라도 더 공장에 남아있는 게 득이다. 복직 후 사표를 쓰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휴직한 지 두 달이 지나고 있다. 지금은 공장을 생각하면 더 이상 못해먹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공장에 돌아가기 어렵게 됐다는 마음이다.  돈으로 환산되는 '쓸모'랑 거리를 둔 삶의 맛을 이미 알아버렸다. 


공장으로 출근할 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7년 넘게 하니 휴일에도 기상 시간이 빠르다. 늦어도 6시에는 한 번은 눈을 뜬다.  휴직을 한 후에는 5시쯤 눈을 한 번 뜬다. 다만 눈꺼풀을 버티지 않는다. 눈이 떠져도 억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다 잤다고 스스로 인정할 때 일어난다. 그래도 아침 6시 30분 전에는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온전히 내 의지로 침대에서 나온다. 


휴직하고 생긴 몇 가지 루틴이 있다. 일어나면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튼다. 아침 스트레칭 영상을 틀고 따라 한다. 아침에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고 호박 차를 마신다. 공장을 다닐 때는 일어나서 20분 안에 집을 나섰지만, 지금은 빨라야 40분이다. 집을 나오면 버스를 타고 정기권을 끊어 놓은 사우나로 향한다. 규모는 크고 시설도 괜찮은데 평일 아침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특히 높지 않은 온도에서 땀을 빼기 좋은 습식 사우나가 있고, 수영까지 가능할 정도로 넓은 냉탕이 있다는 점에 꽂혔다. 사실상 옷을 안 입고 사용 가능한 개인용 피트니스 센터다. 집에서 차로 이동해야 할 거리인데도 정기권을 끊은 이유다.


사우나에서 나오면 그때부터 정해진 루틴은 없다. 땀 빼고, 샤워까지 마친 상쾌함과 함께 밖으로 나와 그때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떤 날은 커피숍으로, 어떤 날은 서점으로, 어떤 날은 빵집으로, 어떤 날은 그냥 걷는다. 그리고 배가 고파지면 점심을 먹는다. 먹고 싶은 메뉴를 먹되, 월급이 끊긴 처지를 고려해 비용은 최소화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루틴은 없다. 글쓰기가 잘될 거 같은 공간을 먼저 고민한다. 글쓰기가 잘 안 되면 책을 읽으면 된다. 보통 카페 아니면 책방으로 가는데 그날 기분이나 날씨 상태 등이 장소를 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거리가 너무 멀다 싶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웬만하면 걷는다.  

저녁때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향한다. 일단 걷다가 피곤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 위치에서 집으로 가는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저녁을 먹은 후 책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날그날 읽고 싶은 책이다.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인문사회 서적이 될 수도 있다. 소파에 누워 읽기 좋은 책이 매일 바뀐다. 공장에서 몸을 혹사해도 잠들기가 힘들었는데 요즘은 누우면 잔다. 


하루는 아침에 집을 나와 사우나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가는데 40대 초반의 부부가 종종걸음으로 나를 지나쳤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속도를 더 내자 옆에 있던 여자가 "아직 시간 충분해"라고 소리쳤다. 핸드폰을 슬쩍 꺼내 본 남자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헉헉 댔다. 멀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오는 버스를 타자'라고 혼잣말을 속으로 삼켰다.    

버스 오는 시간을 핸드폰으로 확인하지 않고 정류장에 도착했다. 몇 분 후 버스가 도착한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남성이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차장으로 보였다. 남성은 버스에 뛰듯이 올라탔다. 두리번거리던 남성은 내 뒷 좌석을 확인하고 앉으며 "어휴, 힘들어"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순간 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고 천천히 목에 둘렀던 목도리를 풀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어 텀블러에 담아 온 따뜻한 호박차를 살짝 들이켰다.  


월급이 끊기고 모아둔 돈을 까먹고 있다. 누가 봐도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고 한 소리를 들을 짓만 하며 하루를 보낸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다. 그런데 그 쓸모없는 삶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10년 넘게 가성비를 따지는 것처럼 시간을 아끼려고 애썼다. 돈 되는 일에 내 생활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만들려고 끼어 맞췄다. 이제는 다시 쓸모를 쫓는 삶을 살 자신이 없다. 가성비 없는 삶에 맛을 봤다. 일단을 이리 살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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