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느니만 못했던 나날

진짜 내 글을 쓰고 싶어서

by 돈태

24시간 거래되는 비트코인 가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듯 쓴 온라인 기사를 보면서 기자를 관둔 이유 하나가 명확해졌다. 더 이상 날림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 기사도 기자가 쓰는 글이다. 시간에 쫓기듯 글을 기계적으로 찍어냈고, 얄팍한 '기술'로 허점을 피해 가려고 애쓰며 썼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기만하는 글쓰기를 그만하고 싶었다. 진짜 내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트럼프가 끌어올린 비트코인...'트럼프發 관세리스크'에 휘청


온라인 기사를 확인하다가 제목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비트코인 대통령을 자처하며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오히려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졌다는 역설적인 제목이 흥미로웠다. 단순히 비트코인 시세만 언급하는 것을 넘어 세계 최강국 대통령의 정책 스탠스가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자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분석했을 내용이 기대됐다. 다만 비트코인 시세가 분 단위로 변동성이 큰 만큼 특정 시점에서의 가격을 기준으로 성급한 진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전날 급락한 비트코인 가격을 기준으로 글을 전개했다. 기사가 온라인상에 노출된 시점은 4일 오전 7시인데 기사에 나온 비트코인 가격은 전날 오후 3시대 기준이다. 온라인에 기사가 떴을 때는 비트코인 가격은 낙폭을 만회하며 회복하고 있던 상황이다. 기사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기본 팩트부터 엇나갔다. '뒷북 기사'라는 조롱 섞인 댓글이 기사에 달린 이유다.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


'비트코인 시세'라는 변동성이 높은 팩트를 시차를 두고 기사를 내보낸 배경은 경험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리스크는 있지만 언론사 수익과 직결되는 클릭수 때문이다. 해당 기사는 '예약출고' 됐을 가능성이 높다. 완성된 기사를 바로 출고하지 않고 출고 시간을 특정할 수 있는 언론사 온라인 기사 시스템이다. 기사에 제시된 비트코인 가격 시간대에는 비슷한 기사가 많을 테고, 아직 기자들이 근무 중인 오후 시간대는 다른 온라인 기사들도 많이 쏟아진다. 클릭 경쟁이 치열한 시간대를 피할 필요가 있다. 기자들이 출근 전일 시간 대는 온라인 기사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 시간 대로 예약출고하면 클릭 경쟁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예약출고 기능은 엠바고, 연휴 기사 등 미리 기사를 작성해 둘 필요가 있는 경우에 사용하는 수단이지만 만 웬만한 언론사는 온라인 기사가 비는 시간 대를 채우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시세를 전달하는 속보성 기사가 아닌 만큼 분석이 들어가야 한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기사 노출의 시차를 두는 만큼 가격 전달 외에 새로운 내용이 필요하다. 새로운 팩트를 취재할 만큼 공을 들일 기사도 아니다. 기사 작성 시점의 가격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는 쉬운 길이 있다. 분석이라는 것이 이미 나와있는 보고서와 다른 기사에서 인용된 전문가 멘트들이 온라인에 수두룩하다. 관건은 섹시한 야마(주제)다. 트럼프 대통령의 역설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고 만족했을 수 있다. 일단 눈길을 끌고, 말이 되게 갖다 붙일 수 있는 팩트들이 나와있는 상태다. 시간에 쫓기며 머리를 많이 굴릴수록 안 쓰니만 못한 기사가 나왔던 것이 경험칙이다.


기사가 말하고 싶은 바는 '트럼프가 끌어올린 비트코인 가격을 트럼프가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비트코인 가격을 급락시키고 있다는 분석만으로는 부족했던 거 같다. 트럼프 당선 이후 비트코인이 급등했던 몇 달 전 상황과 연결해 하나의 주제로 뽑았다. 각각의 분석은 식상하다. 그나마 두 가지 분석을 붙이면 뭔가 새로워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뒷북 분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가격 변동을 설명할 소재가 필요하고, 가장 그럴싸한 팩트를 소재로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관세 정책도 비트코인 가격에 영향을 줬을 테지만 단순한 소재가 실제와 더욱 가까울 수 있다. 기사에 쓰기 어렵겠지만 많이 올랐기 때문에 많이 조정을 받는 중이라는. 분석 기사를 쓰려니 그래도 진지한 분석을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취재에 충실할 시간이 없으니 복잡함을 제거했을 테다. 해당 기사의 논리를 이어가기 위해 비트코인을 위험자산으로 규정한 점이 그렇다. 비트코인의 자산적 성격은 아직 논쟁이 필요한 사안이다. 비트코인은 ETF 승인으로 제도권 자산이 됐다. 디지털 금이라는 평판에 신뢰가 붙은 셈이다. 작년부터 기관투자가 늘어나면서 안전자산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비상관자산으로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채권, 주식 등 다른 자산가격과 연관성이 낮은 자산이라는 의미다. 이는 비트코인의 급격한 변동성을 따져 단기적으로는 상관자산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우상향이라는 제 갈길을 가는 비상관자산으로 보는 견해로 이어진다. 위험자산이라는 표현은 직관적이다. 추가적인 설명 없이도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사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만큼 편하다.


기사의 화룡점정은 '자가당착'이라는 표현이다. 기사의 주제를 꿋꿋이 밀고나가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마치 객관적인 분석이라는 식으로 '기술'을 썼다. 나 역시 기자 시절 많이 써먹은 수법으로 부끄러운 대목이다. 트럼프가 특정 시점의 비트코인 가격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지적을 하면서, 이는 기자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견해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견해라는 증거로 대학 교수의 멘트를 인용했는데 급조한 느낌이 강하다. 대학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가상자산 친화적이라고 강조해 왔지만, 강한 긍정은 오히려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학문적 전문성이 과연 어디 있는 건지.


동병상련일까. 해당 기사를 보면서 과거 기사를 쓰면서 가슴이 답답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예약출고용 기사를 쓰면서 이미 나온 내용을 새로운 내용처럼 각색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던 날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기 위해 대충 쓴 기사들로 꼭지수를 늘렸던 날들. 날림 기사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동원했던 날들. 가끔 이런 현실에 대항할 때면 "너만 깨끗한 척 그만해라. 너도 이제 좀 회사 수익을 생각해야지"라는 핀잔을 들었던 날들. 그럼에도 월급을 기다렸던 날들. 관둘 이유는 많은데 관둘 엄두가 나지 않았던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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