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의 변명?
"나는 납득이 가야 일을 하는데."
드라마 <신성한, 이혼>에서 유능한 신참 변호사가 한 말이다. 신참 변호사가 업계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동력은 '납득'이었다. 난 기자질을 하면서 납득되지 않은 일들을 수없이 겪었다. 그래서 기자로서 실력을 발휘 못한 것일까? 기자로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이력이 없는 것에 대해 비루한 변명으로 '납득'을 들이대본다.
수습교육 기간을 마친 후 정치부를 배치받고 얼마 안 된 일이다. 당시 국회팀장 선배가 갑작스러운 취재 지시를 했다. 국회 기자실로 출근해 짐을 푸는데 선배가 말했다.
"오늘 외부 취재 다녀와야겠다."
전날 출입처의 주요 일정을 확인했지만 눈에 띄는 일정은 없었다. 내가 놓친 게 있나? 선배에게 대답과 함께 물었다.
"네. 선배. 근데 무슨 취재인가요?"
"단독 취재다. 가면 알아. 여기로 전화하고."
선배에게 명함 한 장을 받았다. 명함에는 당시 여당 중진 의원의 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이 적혀있었다. 의원실에 상주하는 보좌진과는 구별되는 직책으로 특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본업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으며 외부에서 의원의 정치활동을 챙기는 실세 또는 측근일 가능성이 높다.
선배 덕분에 단독 기사를 쓰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특보와 통화를 하고 약속 장소인 인사동으로 향했다. 선배는 기자실을 나가는 내게 "취재 잘하고 오늘은 현장에서 바로 퇴근해도 돼. 그리고 동영상도 찍을 수 있으면 찍어봐"라고 말했다. 단독 취재인 만큼 공을 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인사동 거리 한 복판에서 특보를 만났다. 다른 보좌진들은 마이크와 스피커를 세팅하고 있었다. 기자회견 비슷한 무대를 만드는 모양새인데 왜 다른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특보는 팀장 선배와의 친분이 있어 따로 오늘 일정을 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원이 도착했다. 특보는 의원이 설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사람들은 제갈길 가느라 바빴고 나와 보좌진들 그리고 두세 명 정도 될까 말까 한 시민들이 무대 를 바라보 있었다. 의원이 기타를 어깨에 메고 마이크 앞에 섰다. 이상한 느낌이 현실이 됐다. 시민 여러분께 감사 행사를 마련했다는 말과 함께 의원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뭐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라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30분 정도 의원의 노래가 이어졌고, 무표정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한 노래를 마친 의원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나는 의원과 한 마디 못하고 그의 무관중 버스킹을 동영상에 담았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취재 끝났습니다."
"그래 특보(특별보좌관) 잘 만났지. 그 사람이 잘 챙겨줄 거야. 친한 형이다."
"그런데 이거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네요. 의원이 그냥 노래만 부르고 갔습니다."
"기사는 부담 갖지 말고. 영상은 찍었지? 그거라도 잘 만져서 온라인 기사라도 짧게 쏘자."
단독 취재 기사는 짧은 영상으로 편집돼 온라인에 노출됐다. 다행히 제목 옆에 단독이 붙지 않았다. 인사동 취재 후 선배와 함께 특보를 만나는 날이 늘었다. 특보는 열심히 선배를 찾아왔고, 선배는 열심히 특보와의 술자리를 가졌다.
기자를 막 시작했을 때 겪은 인사동 취재는 순진해서였을까, 허무한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 이후 납득되지 않는 일들은 무기력과 회의감을 무럭무럭 키워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선을 도전할 때의 일이다. 회사에서는 은근히 상대당 후보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부장은 유독 열의에 차 있었다. 박원순 시장이 재임 시절에 추진했던 정책과 현재 내건 정책공약에 대한 발제를 원했다. 관건은 정책과 정책공약이 어떤 폐해를 가져왔고, 앞으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를 전망하는 것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박원순 시장에 비판적인 부장을 보며 '정말 싫어하는구나'라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치졸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오판이었다. 부장은 큰 그림이 있었다. 어느 날 부장과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에서 부장의 진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장은 다음 인사에서 유력한 편집국장 후보였다.
"요새 박원순 기사가 별로 없네."
"네. 더 찾아볼게요."
"박원순이 또 되면 안 된다. 회사에 전혀 도움이 안돼."
윗사람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개인적인 감정인 양 내비치면 그만이다. 그러면 역시나 충성스러운 아랫사람은 알아서 긴다. 기사가 설명되지 않은 이유로 킬이 될 때 이런 메커니즘을 실감한다.
최근 재보궐 선거에서 진보성향의 소수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변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변을 낳은 당선자에게 쏠렸다. 당연히 언론들은 당선자 인터뷰에 달려들었다. 선거가 이제 막 끝난 시점이라 당선자와 연락이 닿을 공식적인 루트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적인 인연을 동원해 정당 관계자와 연락이 닿았고 몇 사람을 거쳐 당선자와 통화를 했다. 기사를 전제로 대화를 나눴다. 당선자에게는 재보선 이후 첫 언론 인터뷰였다. 단독 인터뷰의 기사 가치는 충분했고, 부장도 인터뷰에 동의한 상태였다. 기사를 마감하고 출고를 기다리는데 부장한테 전화가 왔다.
"기사 내보내지 말자."
"아니 왜요?"
"국장이 못 마땅해한다."
"네? 다른 데서도 나올 기사예요. 우리가 먼저 인터뷰했는데."
"알겠는데. 거기 당이 너무 작잖아. 성향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부담도 되고."
기사가 막힌 구체적인 이유를 듣지 못했다. 국장의 심기에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를 실토한 부장의 변명만 있었을 뿐이다. 설명되지 이유는 추정을 할 뿐이다. 국장 역시 오너의 눈치가 보였을 테다. 중견건설사를 갖고 있는 오너다. 특히나 노조의 권익을 강화하는 노란봉투법이 정치권 이슈로 떠오르던 때다. 인터뷰를 했던 당선자는 물론 당선자가 소속된 정당은 노란봉투법에 치열하게 찬성했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 정당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딱 한 명이다. 회사는 인터뷰가 부담스럽기보다는 말 그대로 못마땅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달려드는 인터뷰는 킬 하면서도, 왠만한 언론사는 관심을 갖지 않는 인터뷰를 추진할 때도 있다. 한 번은 오너가 휴일에 들렸던 장소에 감명을 받았다며 그 장소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부장은 국장의 지시라는 말만 전했지만, 회사 내부를 취재하면 오더의 전말은 쉽게 파악된다. 막상 섭외가 진행되자 인터뷰 대상자들이 의아해 했다. 제도권 언론사에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질 지 몰랐고, 일부 언론사는 자신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데 괜찮겠냐는 식의 우려감까지 보였다. 후배의 고생으로 인터뷰는 성사됐고 기사는 편집부 인력까지 달라붙어 잘 포장해 출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