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오렌지 빌리지 호스텔. 구글 평점 5점 만점에 3.6점. 도미토리 침대 하나 가격은 하루에 약 4만 5천 원.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가장 싸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이나 덴마크의 코펜하겐도 2만 원대 도미토리가 있다. 살인적인 물가의 북유럽을 압도한다. 3.6점? 368명이 준 점수다. 미국 서부 최고의 상권 유니언 스퀘어에서 걸어서 8분이다. 위치까지 완벽한데 왜 3.6점일까? 양심 없는 점수충들아, 샌프란시스코 최고 노른자 상권에서 가장 싸게 재워주는데 3.6점을 줘? 베드 벅스(빈대) 좀 나오나 보지. 좀 긁으세요. 그러라고 손톱 있는 거야. 변기에 똥 없고, 옷장에서 시체 안 튀어나오면 저는 5점 만점 드리리다. 선택할 처지가 못되면, 내 선택을 완벽하게 옹호할 것. 내 긍정은, 내 처지에서 나왔습니다만. 체크인만 좀 일찍 하게 해 주지. 샤워하고 싶다. 양말 벗고, 발가락 송송 슬리퍼 신고 싶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싶다. 창문 열어놓고 발톱도 깎고 싶다. 발톱 깎기에 딱 좋은 바람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람이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을까? 신비롭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다가 그곳에 내 두 발이 닿는다. 꿈속으로 소풍 가는 것만큼이나 신비롭다. 화성이나 달도 갈 수 있다. 강렬하게 당연하면 이루어진다. 내 바람이 아직 강렬하지 않아서일 뿐. 강렬하게 당연하면, 화성도, 달도 가게 돼있다. 달 표면에 내 발자국을 남길 그날이 와도, 지금의 샌프란시스코보다 더 흥분할 거라 장담 못하겠다. 지금 내가 강렬하게 소망하는 곳은 조지아,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 호주, 베를린 정도.
숙소 건너편에 할랄 가이즈가 보인다. 할랄 가이즈. 할랄은 이슬람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뜻한다. 뉴욕의 명물이다. 이집트인 모하메드가 1990년 맨해튼에서 팔기 시작했다. 고기, 밥, 채소와 피타(중동식 납작 빵), 마약 소스(핫 소스와 마요네즈 소스)를 은박지에 담아 뉴욕의 이슬람 택시 기사를 사로잡았다. 줄 서서 먹는 음식이 됐다. 새치기 시비로 살인사건까지 났다. 뉴욕에서 깜빡하고, 못 먹었다. 숙소 건너편에 있으니, 먹으라는 계시다. 샌프란시스코 자축 메뉴로 딱이야. 뉴욕에선 길거리에서 판다. 여기에선 1층 가게다. 월세 내야지, 세금 내야지. 당연히 더 비싸겠지? 경솔하기 없기. 계시를 무시하기로 한다. 나는 이토록 이성적인 사람이다.
walgreen 마트가 보인다. 세상에, 뚱뚱한 치킨 샌드위치 3.99달러. 보라고! 샌프란시스코에도 빈틈은 있다니까. 한 입에 안 들어가는 엄청난 두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가격에 이런 두툼함은 없다. 미국은 잔인한 나라가 아니다. 몰라서, 못 찾는 것일 뿐. 이제부터 매일 한 끼는 walgreen 샌드위치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는 감격의 세 배에 준하는 감동이다. 과감하게 생수까지 산다. 물 안 먹어도 되는데, 목 막히면 천천히, 오래 먹어서 더 좋은데. 그래도 물 사겠다. 굉장히 부자가 된 느낌을, 생수를 삼으로써 증명하겠다. 샌드위치도 거의 두 끼 분량이지만 한 번에 다 먹겠다. 나는 재벌이니까. 물도 안 남기고 다 마시겠다. walgreen에 다시 와서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겠다. 샌드위치가 너무 뚱뚱해서, 샌프란시스코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뭉클하고, 믿음직스럽고, 사랑고백이라도 해? 코맹맹이 소리로, 제길 몸까지 꼬여. 너랑 사랑에 빠지면, 야반도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좀 와요!”
흑인 경비원이 흑인 여자를 부른다. 마트 바구니를 들고 있는 흑인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아, 글쎄 이리 좀 와요. 바구니 여자는 버틴다. 남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계속 오라고 한다. 여자는 랩을 하듯, 춤을 추듯 다가간다. 공연인가? 미국식 마트 행사인가? Walgreen은 약간 조용해진다. 왜 시비야? 나 돈 있어. 여자는 큰소리친다. 그래 놓고는 바구니를 놓는다. 얌전히 내려놓는다. 뒷걸음친다. 살려고 했어. 진짜야. 돈 있다고. 나 도둑 아니야. 가장 힘없는 목소리로 결백을 주장한다. 도둑이 아니고 싶은 여자는 천천히 사라진다. 경비원은 바구니를 곁에 두고 스마트폰을 본다. 그녀가 도둑인 걸 어떻게 알았을까? 옷차림도 멀쩡해 보였다. 누가 봐도 노숙자인 노숙자와 멀쩡한 노숙자.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는 보이는 숫자의 두 배일 수도 있다.
그녀가 나간 문으로 또 다른 흑인 남자가 들어오다가, 나간다. 선수를 뺏겼군. 눈치를 채고, 시도를 포기한다. 남자는 누가 봐도 노숙자다. 마트 경비원의 안정적인 통제에 약간 감명받는다. 놓인 바구니에는 하겐다즈 피칸 버터 맛, Reese’s 피넛 버터컵(허쉬 초콜릿에서 만든다), 주방 세제가 보인다. 딸기맛, 쿠키맛을 비집고 버터 피칸 맛을 담았다. 오지게 달고, 오지게 짠 reese’s는 하겐다즈에 비해 좀 싸구려다. 서두른 티가 난다. 입맛은 하겐다즈 쪽이었을 것이다. 돈이 있었다면, 돈을 냈을 여자다. 뮤지컬을 보고, 유니세프에도 기부를 했을 여자다. 지금 정말로 돈이 없고, 늘 먹던 하겐다즈가 어떻게든 먹고 싶었을 뿐.
그녀가 샌드위치나 시리얼을 훔쳤다면 더 속상했을 것이다. 하겐다즈여서, 리세스여서 나는, 그녀가 근사하다. 샌드위치가 너무 두껍다. 지겨워진다. 서서 먹는 건 아니지. 먹다 말고, 앉을 곳을 찾는다. 먹다 만 샌드위치가 한 손, 생수 병이 한 손, 대각선으로 맨 소니 카메라. 뜬금 내가 지겹다.
이루었다.
내가 얼마나 오고 싶어 했는지를 명심한다. 샌드위치의 지겨움도 명심하기로 한다. 샌프란시스코 꿈을 꾸고, 샌프란시스코 꿈을 이루었다. 우린 착각한다. 꿈을 이룬다를 해피엔딩으로 해석한다. 꿈을 이루는 짧은 순간. 꿈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전혀 다른 시간으로 채워진다. 새로운 투쟁이다. 꿈을 이루었으니 그것대로 감격하고, 싸구려 샌드위치에 연연하는 내 꼴을 그것대로 지겨워하면 된다. 내 샌드위치에 침을 삼키는 노숙자와 개에게 줄 육포가 주머니에 가득인 여자도 공존함을 명심한다.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명심하는 것. 그것만으로 찬란하다. 충분하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글로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복무 중인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실래요? 저의 오체투지를 좀 더 가까이 지켜봐 주실래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렀으니 단골 맛집, 카페가 좀 많겠어요? 태국 음식 이야기와 단골집 이야기입니다. 즐겨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