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할 땐, 크리스마스를 떠올려요
(이 글은 2019년 크리스마스 때 독자에게 보냈던 편지글입니다)
(2007년 런던에서 찍은 사진 같은디 가물가물하네요)
방콕 시간으로 여덟 시 사십육 분이네요. 굳이? 지금? 매일 글을 쓰기로 했죠. 크리스마스이브에, 굳이? 지금 누가 글을 기다리겠어요? 1년 중에 오늘이 가장 특별한 날인 사람도 많을 텐데요. 늘, 저는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써요. 조금 쓸쓸한 사람을 떠올려요. 밝은 사람은, 떠들썩한 곳에서 행복할 테니까요. 굳이 제 글이 아니어도 되니까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과 마주하고는, 일방적으로 떠들어요. 그런 상상은, 저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죠. 나는 써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써야 한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려요. 크리스마스에 제 메일부터 열어보시네요? 이왕이면 음악 정도는 틀어주세요. 어떤 음악이든지요. 와인이나 소주 같은 건 없으세요?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오시고요. 이것저것 주문하는 게 많죠? 저 대신 먹어주세요. 며칠 전에 빠똥꼬를 먹었어요. 태국에서 파는 시장표 도넛이에요. 달달한 설탕 두유랑 같이 먹죠. 소화력도 떨어지고, 역류성 식도염도 잔잔히 유지 중이라서요. 공복에 시장표 도넛은 큰 마음먹어야 해요. 그 날은 간덩이가 부어서 커피도 마셨죠. 두 잔이나요. 요즘 좀 위가 괜찮다 싶었 거든요. 웬걸요. 어제 아침부터 위가 딱 굳어서는 안 움직여요. 종일 고생했네요. 이 몸뚱이로 여행은 무슨. 이렇게 살아도 되나? 글을 쓰는 게 맞아? 매달 이렇게 돈걱정하면서 살아야 할까? 우중충한 생각만 하게 되더군요. 소화만 잘 됐어 봐요. 점심엔 컵라면을 먹고요. 저녁엔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을 거예요. 연말의 세상이 너무도 귀엽고, 다가올 2020년도 마냥 설렜겠죠. 저 대신 떡볶이라도 덥히세요. 고추장, 설탕, 다시다만 있어도 기본은 해요. 떡 없으면 라볶이도 괜찮죠. 다시다랑 설탕으로 만든 떡볶이가 맛없을 수가 있나요? 그런 맛 싫어하신다고요? 깔끔하게 고춧가루랑 올리고당으로만 맛을 내보실래요? 그땐 파를 좀 많이 넣으시면 좋아요. 그런 크리스마스도 근사해요. 떠들썩하지 않아서, 더 좋아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어요. 가게 안. 코딱지만 한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잤죠. 가게문을 열고, 아침까지 준비하여야 하는 어머니는 얼마나 바쁘셨을까요? 그 와중에도 자는 우리 형제를 꼭 안고, 볼을 비비세요. 침이 꼴깍 넘어가는 시간이기도 하죠. 오줌싸개였거든요. 어머니가 목장갑이라도 쓰고 있으면, 오줌을 안 들킬 수가 있어요. 장갑 덕에 축축한 내복을 감지 못하시는 거죠. 어머니가 저를 안을 때마다, 제 심장은 요동쳐요. 아마도 쌌겠죠. 거의 자포자기. 오줌을 지린 날이 그렇지 않았던 날보다 훨씬 많았으니까요. 아랫목만 까맣게 타들어간 모노륨 장판, 창호지를 덧댄 방문. 웃풍은 방안의 물도 얼게 만들 정도였죠. 형과 나는 강아지처럼 아랫목으로 꾸역꾸역 파고들죠. 어머니가 이불을 걷어요. 시린 바람에 몸서리를 치죠. 형을 안고 뽀뽀, 저를 안고 뽀뽀. 아이고 이쁜 내 새끼. 저는 오줌을 지렸을까요? 안 지렸을까요? 어머니가 몽둥이를 찾지 않으시네요? 아, 안 지렸군요. 살았어요. 오늘 제 엉덩이는 무사하겠군요. 오줌을 지린 날이면 어머니는 제 한쪽 팔을 잡고 쭈욱 일으켜 세운 후에, 빗자루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려치셨죠. 저는 비명을 지르고, 그걸 보는 형도 비명을 지르고. 졸음이 안 가신 상태에서 방안의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요. 어린 나이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요.
-이게, 뭘까? 누가 이걸 가져다 놨을까잉?
비닐봉지 두 개가 방구석에 놓여있네요. 봉지 안에는 초코바, 크래커, 웨하스 등이 들어 있었어요. 구멍가게 아들이라 과자는 실컷 먹었을 것 같죠? 한 푼이 아쉬운 어머니는, 제가 뭐라도 몰래 먹으면 몽둥이를 드셨어요. 보통의 아이들처럼 저도 늘 초코파이가, 초콜릿이 먹고 싶었죠. 봉지에 그런 과자들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밥도 먹지 않았는데, 초콜릿부터 먹을 수 있는 아침이라뇨? 그런 아침은 미국 아이들이나 가능한 거 아니었나요?
-오늘이 크리스마스야. 산타 할아버지가 주고 가셨다잉. 산타 할아버지가 누군지는 알어?
사실 형이나 나나 크리스마스나 산타 클로스는 관심이 없었어요. 몰랐으니까요. 그런 날엔 루돌프 썰매를 타고 산타클로스가 온다는 것도 전혀 몰랐어요. 유치원이라도 다녔어야 알죠. 변변한 동화책이라도 읽었어야 알죠. 아무 기대도 없는 단칸방에는 과자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안 팔리는 과자들이었던 것 같지만, 그러면 어때요? 우리 형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죠. 달걀을 사러 온 손님 때문에 어머니는 서둘러 나가시고요. 형과 나는 이불로 온 몸을 말고, 봉지에 있는 과자를 하나씩 꺼내요. 하나씩 꺼내서 방바닥에 일렬로 놓고, 서로를 보면서 웃어요. 이렇게 많은 과자를 한꺼번에 먹어도 되는 날이 크리스마스로군요. 자기가 먹던 과자를 하나씩 줘요. 서로 더 먹겠다고 늘 주먹다짐을 하던 우리는, 풍요의 기적에 눌려서 천사가 됐죠. 크리스마스는 그때 깨우쳐요. 따뜻한 날이구나. 달콤한 날이구나. 생일보다 좋은 날이구나.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방에서, 초콜릿 코팅이 단단한 초코파이를 먹어 보세요. 엉덩이는 뜨끈뜨끈, 코끝은 얼얼. 일부러라도 그런 방에 기어들어가, 그때의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요. 그렇게 차곡차곡 크리스마스가 쌓였죠. 서른 살까지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었어요. 이젠 방콕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글자를 하나씩 옮기는 크리스마스이브네요. 너무 고요하지만, 제가 택한 크리스마스니까요. 저는 잔잔하게 행복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쌀국수를 먹었고요. 내일은 치앙마이로 내려가요. 평생 간직할 기억을 담으러요. 부모님은 모레 오시고요. 무사히 잘들 오셔야 할 텐데요. 어쨌거나 2019년의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가요. 2020년의 크리스마스는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왔으면 좋겠어요. 이러나, 저러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PS 오늘 제가 사는 아파트 위층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어요. 저는 방에 갇혀 사는 신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장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려야 해요. 저의 가장 좋았던 시간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매일 글을 씁니다.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저의 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