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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mymeyou us Sep 11. 2022

저는 몇 대손이에요?

안동 권 씨 36대손 부정공파  


하암


  아빠가 안동 권씨 가문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할 때 난 늘 하품을 해댔다. 그놈의 가문이 뭐가 중요하며 그 근본이 대체 나랑은 무슨 상관이며…, 도무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사실은 사람으로서 애정 하는 한 사람의 한 질문에서 이 호기심이 증폭되어버렸다.


와, 안동 권씨 잘 없는데, 반갑다! 몇 대손 무슨 파야? 요즘 이런 질문 안 하나? 어쨌든 반가워!


앗, 저는 몇 번 듣긴 했는데 까먹어 버렸어요. 한 번 여쭤볼게요.


  대한민국의 여느 경상도 집안의 흔한 4인 가족처럼(물론 편견이다.) 나는 아빠랑 매우 어색하고 서먹한 사이이다. 아직도 말을 놓지도 못했으며 사실은 그 흔한 밥은 먹었니, 오늘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조차 어색한 사이이다. 이런 사이가 된 까닭은 아마 서로가 다가오지 않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빠의 가부장 가족 경영방식이 도무지 맞지 않았고, 가끔 실수로라도 나를 ‘출가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더욱 가족 간의 정을 쌓는 것이 어려웠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내가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곧 남이 된다는 경고장 같은 건가? 싶었다. 그 밖에도 아빠의 발언들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언제부턴가 아빠의 입이 떨어지면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가족 간의 약속이 생길라치면 갑자기 팀플이 생겼고, 중요한 약속이 생겨났다는 핑계가 늘게 되었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감정은 뭐랄까… 나에겐 늘 등을 보인 존재, 늘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서든 지켜내기 위해 나를 외롭게 만드는 존재쯤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본의 아니게 한켠의 외로움을 가지고 자라 버린 나에겐 아빠는 참 나를 외롭게 만든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방식(사실 훈육인지 잘모르겠다.)은 아직도 문이 쾅 소리 나게 닫히거나 아빠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할까 눈치 보게 만들며, 그 눈치를 더 큰 목소리로 대항하게 만들 때도 있다. 나도 더 큰 목소리를 내면 나를 존중해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빠는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속마음으로 나의 불행을 야기하는 감정들을 표출하니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가끔 아빠 편을 들면서 그래도 속은 따뜻하다나 뭐라나 하면서 나보다는 아직 아빠의 편에 서는 것을 보곤 나도 더 그들과 나의 선을 잘 구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둘은 부부, 나는 단지 그들의 자식일 뿐이다. 나는 고로, 저들과는 어찌 보면 다른 세대에 살고 있는 타인일 뿐일 수도 있다. 나의 세계관은 지금 나의 세계에서 내가 다시 만들어낼 것이라며 다짐했다. 나는 가끔 아빠가 밉지만 나 자체로는 별로 불행하지 않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꽤나 많고, 애정 하는 존재들이 더더욱 늘어났으며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그 어렸을 적 나보다는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의 본질을 바로 보고 싶은 욕심도 최근에 생겼다. 그 얽히고설킨 아빠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나에게도 다른 실마리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그래서 질문했다.

저는 안동 권씨 무슨 파예요?
저는 몇대손이예요?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아직 마음속에 미움, 고독, 애잔함, 안타까움의 마음들이 뒤섞여있다. 그도 어쩌면 한 가부장 사회에서의 피해자로 행복할 방법을 잊어버린 안타까운 사람 중 하나라는 생각도 잠시 스쳐갔다. 그 무거운 가부장 따위의 짐을 어깨에서 떨치고 나면 그에게도 새로운 해방감이 찾아올 텐데, 대체 무엇을 지키고 싶어서 저리도 본인만의 싸움을 한단 말인가? 자신만을 지키려는 나머지 아빠는 현재 가족과 한 식탁에서 식사도 하기 어려워한다. 어렵다라기 보단 어색해한다. 딸에게는 먼저 말을 거는 방법을 잊어 딸이 올 때면 스윽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엄마에게는 이런저런 것들이 영 못마땅하다며 화를 내며 감정을 표현한다. 남동생에게는 시비조로 이것저것 똑바로 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한다. 나는 아빠를 사실은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나도 나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네가 싹수가 없어서 혼나는 거야.’라는 말들로 아빠의 화 받이가 되는 것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나조차 여긴 적이 있었다. 나는 은연중에 내 성격이 싹수가 노랗고 못된 사람이어서 어쩌면 사랑받을 자격이 나에게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빠의 ‘화’는 본인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는 꽤나 회사에 근 20년 가까이 충성했지만, 결국 학벌주의 사회에서 밀려버렸고 그 시점 자식들은 대학을 갈 무렵이 되었다. 고등학생 자식들에겐 자연스레 학벌은 중요하다며 잔소리를 시작했겠지. ‘대학은 SKY 아니면 의미 없어.’라는 말을 SKY가 아닌 대학을 나온 사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열등감? 굳이 사랑의 색안경을 끼고 재해석해보면 ‘너희는 나처럼 학벌 때문에 서러운 일을 겪지 말거라.’라는 뜻이겠지. 그래서 나와 내 동생은 재수, 삼수까지 해가며 S대에 입학했다.(서울대는 아님^^) 그래도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대학에 막상 자식이 입학을 하고 나니 아빠는 여기저기 은연중에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삼수생은 사실 내가 했는데, 여자가 무슨 삼수냐며 핀잔을 들었던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정도로 아빠는 여전히 이중적이고도 나에게는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다. 애써도 인정받지 못하는 좌절감을 겪게 해 주었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외롭게)라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외로움은 나를 고독하게 했지만 그 고독은 나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 되어주었으며 주변의 감사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었다. 분하게도 나는 아빠의 바람대로 잘 자라 버렸다. 한때는 아빠가 곁을 주지 않는 서글픈 마음에 나도 마구 흐트러지고 나를 망쳐버리고 싶단 생각을 한적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나의 그러한 심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여러 조력자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나의 감정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며 나의 이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상하게 마구 삐뚤어지고 싶던 마음들이 오히려 삐뚤어지고 싶다며 내뱉고 나니까 더 잘살고 싶다는 생각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더 잘 살고 싶다. 아빠 같은 남자 만날까 봐 절대 결혼 안 할 거라는 다짐도, 아빠처럼 될까 봐 ~는 절대 안 할 거란 둥의 다짐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나의 새로운 인생의 줄기를 따라 걸어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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