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하사나
잠이 오질 않아서 간단한 스트레칭 위주의 요가를 했다. 요가소년이라는 채널인데 굿모닝요가 굿나잇요가 등 따라하기 쉬운 것 위주로 하고 있다.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된 이유는 오늘 요가를 하고 ‘사바하사나’를 하는데 엉엉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바하사나란,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편안하게 누워서 휴식을 취한 다음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움직이면서 다시 의식을 돌리는 것인데,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하나 움직이면서 문득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과 발가락들 이었건만 이렇게 작은 움직임에 감사함을 느끼다니. 아, 나 살아있구나 라는 생각이 마음에서 부터 차올랐다. 늘 한켠이 비워있는 것만 같던 한때의 나날들이 안쓰럽고 그날들이 지나고 지금의 작은 움직임에 감사하고 있는 오늘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간 힘들었던 응어리들이 잠깐의 감사함에 녹아버린 것같이 나는 잠시 체면은 잊고 엉엉 울어버렸다.
대학생 때 수강했던 교양 요가 수업에서 사바하사나를 하고 나서 펑펑 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지금의 나라니! 그땐 한창 대학생 시절이었고 여럿이 함께 듣는 수업이다 보니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1시에 잠이 오질 않아서 했던 간단한 30분 요가에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나 왜 울지?
아, 나는 그냥 이렇게 존재한 것일 뿐인데, 행복은 정말이지 내면에서 온다는 것이 맞다. 아니, 꼭 행복감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오묘한 감정들, 내가 인간이기에 느끼는 부끄럽고도 연약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슬퍼서 운 것도 아닌데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정화된 것만 같았다. 내면에서 꽉 차서 바깥으로 감정이 휘몰아치는 경험. 어쩌면 인생에서 몇 번 안 될 그 경험을 생생게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남기고 싶었다.
요가란, 고단한 과정이 지나고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요가는 잘하고 못하고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수행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나의 몸에 맞추어 내가 행할 수 있는 만큼의 범위를 욕심내지 않고 행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나는 한때 요가를 싫어했다. 요가를 하면 내 뻣뻣한 몸이 남들과 다르게 유달리 느껴졌고, ‘이 동작을 해서 도대체 어느 부위가 날씬해지고 어디에 효과가 있는 거야?’라는 생각뿐이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이 꼭 더 나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데, 목표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어떨 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모습도 그 여유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가. 과거에 꼭 앞으로만 나가고, 앞으로만 걸어가고 싶었던 날들에 지쳤던 나에게 위로를 보낸다.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존재만으로 가치 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오늘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 대면서 나를 느낀 것 처럼말야. 행복과 불행도 꼭 행복이 선이고 불행이 악이지 않다. 행복에서 오는 충만이 있으면 불행에서 오는 교훈도 있듯이, 행복함만을 맹목적으로 좇을수록 행복할 수 없다는 역설이 찾아온다.
#행복의 정의
매년 어느 시점에 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사색에 빠지곤 한다. 그 시점 만난 친구와의 대화에서 행복은 단지 어떤 상태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한 점이 아니라 점이 선으로 이어진 상태 들일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오히려 행복해지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은 무언가를 열심히 이뤄서 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길에서 맡았던 라일락 꽃향기에 킁킁대던 콧구멍, 구름 사이로 비치던 햇볕에 따스함을 느끼던 피부의 촉감, 달콤한 바닐라 라테의 맛을 음미하던 때에 있다. 행복을 ‘쾌감’과 착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내가 정의한 행복은 오감의 ‘쾌감’이 아니라 나의 오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하는 ‘평온’의 상태이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