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견 봉사 세 번째, 용인 위액트
무슨 일이든 세 번은 해보아야 안다. 봉사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20년 지기 동네 친구도 함께 유기견 봉사에 참여했다. 세 번을 연달아 봉사를 자원하다 보니 친구에게 고인물 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게 세 번째 봉사를 위해 용인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용인 위액트로 향하는 길은 서울 서쪽 기준 차로 약 1시간 30분을 가야 한다. 다행히(?) 첫 운전을 강원도에서 배워서 그런지 웬만한 길에는 당황하지 않는 깡이 생겼으며 비포장도로도 일단 잘 달리다 보면 큰 길이 나온다는 진리도 깨쳤다. 그래서 세 번째 운전은 별 탈 없이 보호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용인 위액트 보호소는 가 봤던 두 개의 보호소와 비교해 보자면 가장 시설이나 강아지들의 관리 상태가 양호했다. 후원금이 가장 넉넉한 보호소라는 소문에 걸맞게 양호한 강아지들의 상태에 한결 마음이 놓인 보호소였다. 첫 봉사를 가장 난도가 높다는 계양산 아크 보호소에서 시작을 하였기 때문에 이번 보호소에서의 봉사가 수월하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강아지들을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고, 내부 물청소를 시작했다. 따로 배수시설이 곳곳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쓰레받기로 오물이 섞인 물을 양동이에 모아 한 곳의 배수구에 흘려보내야 한다. 두어 번 정도 내부를 잘 헹구어 주고 다시 강아지들을 제자리에 배치시켜주는데 이때 이름이 저절로 외워졌다. 지금 보호소에 있다는 점이 무색하게도 강아지들이 밝아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행이다 싶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내부를 청소하고 강아지들의 밥을 주고 물을 주고 나서 잡초를 뽑기로 했지만 예상치 못한 비가 와서 실내에서 강아지들과 놀아주는 것으로 봉사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내며 각 강아지들이 어쩌다 유기견 보호소엘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는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까지 받았지만 보호소에서 잘 적응한 덕에 암이 전이되지 않고 현재까지 잘 지내고 있는 보호견 이야기를 듣곤 더 시간을 보내주려 노력했다. 조그만 포메라니안 보호견은 번식장에서 구조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성병에 걸리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잘 옮지도 않을뿐더러 옮아도 감기 수준으로 앓고 지나간다고는 하지만 도살을 시켜야 하는 코드의 성병이기 때문에 도살 위험에 처해있었다. 위액트 측에서는 책임지고 관리할 터이니 보호소로 데려오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작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강아지는 번식장에서 무리한 출산을 해야 하고, 몸집이 큰 강아지는 강제로 더 크게 개량하여 식용으로 도살된다. 대충 그러할 것이다 짐작은 했겠지만 실상을 보고 나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란 뭘까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는 상하 관계일까? 동물은 우리가 필요해서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량되고 사용되고 버려져도 되는 것인가?
육식은 인간이 계속해오던 식습관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부분이다. 석기시대 때에도 사냥용 돌도끼와 끼를 발라내기 위한 도구들이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나도 의문을 가지는 것은 ‘육식’ 자체에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 육식을 위해 저질러야만 하는 일들이 더더욱 교묘하고 치사해졌으니 문제가 된다. 지금은 고기를 먹기 위해 직접 도끼를 들고 사냥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야생에 있어야 하는 동물들을 조그만 우리에 가두고 더 먹기 편리하게 개조하고 있다. 몸집은 더욱 크게 교배를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호르몬 주사를 놓는다. 그런 상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우리가 먹기에 편리해질 대로 편리해진 사냥감을 간편하게 사냥한다. 이것을 정직한 사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식탁에 놓인 저 간편하게 조리된 고기 한 덩이가 거쳐온 과정들을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얻는 것은 불공평한 사냥이다. 단돈 만원 가량에 쉽게 취할 수 있는 저 붉은 고기 한 덩이에 요즘 들어 강하게 의문이 든다.
특히 개고기의 경우 이 치사한 방법이 아무런 규제도 없이 더 과감하게 실행된다. 최소한 도살을 할 때 지켜야 할 동물보호법조차 지켜지고 있지 않다. 도살장의 개들은 현행 동물보호법 제8조 1항의 1호(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와 2호(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위반하는 방식으로 도살되고 있다. 한 때 나도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다.(오리고기라고 부모님이 속이고 어릴 적 몇 번 먹였던 기억이 난다. 몸에 좋은 거라며…) 그때는 ‘소와 돼지 닭은 되고 왜 개는 안돼?’라는 주장에 나도 묵인하며 동조했다. 지금은 단지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지나치게 잔혹하게 도살되고 있는 방법들이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온갖 항생제를 투여해 키워 낸 고깃덩이가 인간을 분명히 위협하고 있다. 과연 각종 성인병과 아토피 혈관질환들은 우리의 과한 육식이 부른 부작용이라는 걸 부정할 수 있을까. 마치 정보 과다의 사회에 직면해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는 음식 과다의 사회에 살고 있다. ‘굶주림’보다는 ‘다이어트’가 더 문제가 되는 오늘날 이제는 무얼 어떻게 먹을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연한 계기로 우연하게 유기견 봉사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우연이라기엔 늘 몇 년째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있었고 의무감이 있었다. 우연은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갖추게 된 지금의 여유가 생긴 것뿐이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은 그 계기를 지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더 끈질기게 이 우연들을 지켜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