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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4. 2024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쉬운 법

런던 9일 차 - 2024년 1월 16일

울적한 기분으로 잠을 청한 것치곤 비교적 양질의 수면 후에 눈을 떴다. 어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꿈이면 좋겠다고, 자고 일어나면 달라져 있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영국에 있는 동안 일상이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은 내려놓은 지 오래고 이제는 그저 빨리 시내로 나가 여기를 벗어나 있기만을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가슴께의 높이를 가진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는 승모근을 있는 힘껏 사용해야 한다. 불편한 자세로 석회가 잔뜩 끼어 있는 커피포트를 씻으며 첫 번째 호스트가 잠수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자문한다. 잘 모르겠다. 달랐을 수도, 같았을 수도 있다. 만약 지금과 같았다면 그 집을 선택한 나의 안목을 탓하며 한껏 속상했겠다. 그래. 적어도 지금은 첫 번째 호스트에게 이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다. 당장 자야 할 곳을 정해야 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급히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재고 따질 시간이 없었잖아. 역시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하는 류의 인간이다. 갈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은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도보로 13분 남짓. 양손이 가벼운 채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며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동네를 둘러본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왜 오감이 촉수처럼 뻗어 나와 기묘한 기분을 조성했는지 이제야 형용할 수 있다. 여기는 로컬들을 위한 동네가 아니다. 이민자로 가득한.. 이방인의 도시다. 자신도 이방인의 외양을 하고 있으면서 이 동네가 불편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 상황에 놓인 나를 가장 위협하는 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느낌이다. 오후 늦게 나가서, 해가 지기 전에 꼭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지하철 노선표를 보니 확실해진다. 분명 어제까지는 ZONE 1에 있었는데, 지금은 ZONE 4에 위치한다.


런던 셋째 날 버로우 마켓 근처에서 우연히 들른 카페의 라테는 에코 컵 보증금을 5파운드나 받았다. 종이컵이 없어 재사용 컵이 필수인데 컵을 다시 가져오면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지난 일주일 간 목적 없이 가방에서 굴러다니며 거슬리게 하는 이 컵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시 런던브릿지 역으로 왔다. 인산인해를 이룬 카페에서 직원과 이야기하기 위해 한참을 줄 서있었는데, 컵을 돌려주기 위해 왔다고 하자 직원의 표정이 정말 말 그대로 180도 변했다. So Sweet을 얼마나 들었는지. 고마움을 있는 힘껏 표현하는 모습에 덩달아 뿌듯해진다.


근처를 배회하다 갑작스러운 익숙함에 당황했다. Delight Art Centre에서 서울을 주제로 미디어 아트 전시를 하고 있더라고. 일단은 다음을 기약하고 지나가기로.


이쯤 되면 난 피시 앤 칩스 집착광공인가 보오. 마침 근처에 북마크 해 둔 맛있는 피시 앤 칩스 펍을 보고 여기까지 왔다. 충격적으로 맛이 없던 어제저녁을 보상하기 위해선 이 정도는 먹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맛있다고 하는 피시 앤 칩스의 공통점은 얇고 바삭하게 튀김을 잘 튀긴다는 것. 지난주에 방문했던 Mayfair Chippy와 굳이 비교하자면 Mayfair Chippy가 일본식 튀김옷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좀 더 잘 맞았는데, 여기도 충분히 맛있다. 그나저나.. 이젠 맥주 한 잔으로도 알딸딸하다. 영국 맥주는 훨씬 쎈 것인가.


식사 장소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테이트 모던이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우울한 내 마음을 북돋아 주기 위한 걸까. 강변을 따라 걷다가, 새 집 - 무려 자가를 마련했다! - 집들이를 하고 있는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마침 화면 속 맑은 날씨를 보는 친구들은 나의 휴가를 부러움으로 표현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에어비앤비 사기당해 여기까지 오게 된 고군분투를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고생한 내게 보상해 주기 위한 점심을 먹으며 어수선한 마음을 잘 갈무리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지금 휴대폰 속 저 자리에 함께 있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훔쳤다. 길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답답한 마음은 소폭 해갈되었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테이트 모던으로 입장했다. 거대한 층고의 천장과 그 공간이 주는 압도감을 느끼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좀 전의 통화를 곱씹는다. 숙소 사기로 인해 급하게 뉘일 곳을 찾느라 예상하던 것보다 많은 지출을 했음에도 새로운 보금자리가 여러모로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은 단박에 "그래서 거기서 나왔어? 이왕 돈 쓰는 김에 조금 더 써. 얼른 나와." 하고 말했다. 맞다. 거기서 나오는 선택지가 있다. 왜 이 생각을 진작 못 했지? 환불은 둘째치고 일단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공간에 나를 놓아둘 선택을 할 수 있다. 돈을 아낄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와서는 안 됐다. 내가 사랑하는 영국을, 런던을, 불편한 기억으로 남겨둘 수 없다.


그 길로 바로 숙소로 향했다. 어떻게든 있어볼 만한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한 세제와 온갖 청소도구들은 전부 다 놓고, 열심히 풀어두었던 짐을 다시 바리바리 싸서, 호스트의 병원행으로 그제 밤 뜻하지 않게 묵었던 호텔로 향한다. 쫓기듯 모든 짐을 싸서 홀연히 떠나 호텔로 가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되는 나의 로망.. 비로소 완성이다.


호텔 리셉션에서는 갑자기 영문을 모르게 풀 부킹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근처에 또 다른 호텔이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고. 그래, 그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짐을 이고 지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렇게 향한 근처 호텔에서도 Totally full booked라는 비보를 말한다. 런던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오늘내일 갑자기 모든 예약이 꽉 찼다고. 당장 나오긴 했는데.. 나 어디로 가야 하지. 아직 호스트에게 체크아웃을 말하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야 할까. 나의 복잡한 표정을 본 직원은 있는 힘껏 주변에 있는 근처 계열사 호텔을 찾아준다. 리셉션 직원은 나를 위해 정말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었다. 이게 그들이 해야 하는 당연한 서비스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를 위해 애써준 마음을 기억 속에 꼭꼭 담아둘 거야. DoubleTree by Hilton London Angel Kings Cross의 Immanuel 씨, 당신의 호의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사소한 친절은 도시의 인상을 바꾼다. 내 이름을 미스 초이로 기억할 그에게도 나의 인상이 좋게 남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우여곡절 끝에 체크인을 하고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허기가 진다. 근처 와사비에 가서 새우 똠얌 국수를 포장해 왔다. 다녀오는 길에 러쉬가 보이길래 배쓰밤도 사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노곤한 저녁을 보냈다. 이제야 복잡하게 꼬여 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다. 그래도 괜찮다. 실수와 실패로 좌절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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