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시 시작하는 피아노
내게 피아노는 조금 특별한 의미다. 못다 한 꿈, 첫사랑, 그것도 지독한 짝사랑, 갖고 싶어 열망하던 것. 유년시절, 실제로 매일 귀갓길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이었던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집에 가면 피아노가 뿅 하고 있게 해 주세요. 엄마가 나 몰래 피아노를 사 두었다며 저를 깜짝 놀래키게 해 주세요. 제 피아노가 생기면 매일 연습할게요. 그러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진짜 내 피아노가 생겼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예쁜 콘솔 피아노였음에도 엄마는 일반 업라이트 피아노가 더 좋은 거라며 우리 집에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들였다.
그렇지만 역시나.. 잡은 물고기에게 더 이상 밥을 주지 않는 건 어린아이에게도 인지상정. '내 거'로 연습하는 효과는 3개월이 최대였다. 5번 연습하고 사과 10개 색칠하는 일상은 연주회를 앞두고선 정직해졌다. 선생님께 레슨받다 안 혼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유능하게 소화해야 하며, 함께 연주회를 준비하는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은 매일 피아노 앞에 앉게 했다. 그렇게 특훈을 거친 곡이 기억나는 것만 두 개. 5학년 때는 G.Lange <Blumenlied> Op.39, 6학년 때는 Debussy: Suite bergamasque, L.75: III. Clair de lune이다. 특히 랑게의 '꽃노래'는 피아노 명곡집에 수록되어 있어 소싯적 피아노 좀 오래 배운 사람이라면 아 이거! 하고 바로 알 수 있다.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은 모두 따로 악보를 인쇄해야 하는 곡(쇼팽 왈츠나 베토벤 소나타였던 것으로 기억)을 선정해 주신 반면 나만 피아노 명곡집에 있는 악보로 연주회를 준비한다는 게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데 (그 시절엔 명곡집을 굉장히 얕봤었다) 오랜만에 들으니까 되게 좋네... 초딩시절 나.. 오만했네..
십 대까지는 간간이 피아노 커버를 열었다. 홀로 명곡집을 뒤적이거나, 쳐보고 싶은 곡을 인쇄해 마음껏 연습했다. 주로 쇼팽의 곡이었다. 에튀드나 녹턴, 발라드를 기웃거리며 이렇게 어려운 악보가 어째서 에튀드(연습곡)야? 하는 볼멘소리를 내뱉곤 했다. 기교나 음악적 표현은 차치하고 일단 틀리지 않고 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연습이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냐는 물음엔 자신 있게 피아노라 대답하며, 내 방의 오디오 플레이어에서는 언제나 '베스트 피아노 클래식 100 (Best Piano Classics 100)'의 CD가 재생됐다. 그럼에도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는 성인이 되며 피아노는 자린고비가 아끼던 굴비 신세로 전락했다.
먹고 살 만해지니 다시 피아노 생각이 나더라. 최근 발매된 손열음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들으니 꺼진 줄 알았던 열정에 불이 붙었다. 전부 진압된 줄 알았는데 아직 불씨가 살아 있었다. 버리지 못하고 여태 이고 지고 있는 피아노 악보들을 펼쳐 본다. 소나티네, 명곡집, 모차르트 소나타, 바흐 인벤션&신포니아... 수월하게 보던 악보인데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오선지를 꼽아야 계이름을 알 수 있다. 평소에 절대음감이라 자부했건만, 오케스트라 튜닝음이 A(라)인 걸 알면서도 G(솔)로 들린다. 이 상태라면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지나간 세월은 자신을 수동태로 변모시키고야 말았다.
일 년은 고민했나 보다.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규칙적인 레슨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다 능동태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원하는 곡 하나만 완성하는 흥미 위주의 배움 말고, 다시 처음부터 돌다리를 두드리고 싶었다. 유수의 연주를 보고 듣는 게 일상이 된 지금, 고급이 되어버린 귀를 만족시킬 만큼의 연주가 뚝딱 되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선생님을 찾았다. 운 좋게 발견한 회사 근처 레슨실. 선생님은 상담하는 날부터 다시 기초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원하던 대로 아주 기본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실 선생님을 모셨는데도 막상 제3자를 통해 내 수준을 직면하니 많이 아팠다. 이 정도로 처참할 줄 몰랐다. 스스로가 창피해서, 한동안은 어디 가서 '피아노 다시 시작했다'고 말도 안 했다.
분명 열세 살까지는 잘 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왼쪽 악보를 읽고 뜯고 씹고 소화해냈었는데(물론 그 과정이 매우 지난했지만) 이제는.. 오른쪽의 기초 악보를 보면서도 버벅대는 꼴이라니... 피아노를 사랑한다와 잘 친다는 동의어가 아닌데 같은 선상에 두었던 오만함에 망치를 든다. 부족함은 창피한 것이라는 관념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부자가 사업에 실패해 지금은 빈털터리임에도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모습이다. 라떼는 달랐다며 현재를 수용하지 못하는 꼰대의 전형이다. 피아노 앞에 앉을 때 마다 옹졸한 마음에 봉착한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금의 구린 나를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용기를 내어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피아노에는 나의 자랑과 성취, 행복, 그리고 열등감과 자괴감까지도 전부 담겨 있다. 일상 속 피아노가 완연히 자리 잡은 지금을 즐기면 된다. 드뷔시의 달빛을 다시 끝내주게 연주하며 열세 살의 나를 마주하는 그날까지.